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6시 반이었습니다. 어둑한 시간,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한적한 거리를 오랜만에 운동을 하면서 걸어보았습니다. 살을 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금세 얼얼해졌습니다. 찬 공기는 오십 대 후반에 접어든 요즘의 마음 사정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야속하게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아침 욕실 거울에서 마주했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처진 볼살, 자글자글한 눈가, 굵게 주름이 그어진 목과 이마.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시간이 내 얼굴을 한참이나 지나가 있었던 모습. 젊을 때는 머리모양이 흐트러질까 꺼리던 패딩 후드를 깊숙이 눌러썼습니다.
한참을 걷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방향이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스포츠센터로 향해야 할 발걸음이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2주간 거의 매일같이 드나들던 자원봉사 장소 쪽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몸은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십 대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오십 대가 넘어가니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나이가 든 건가.’
‘늙는다는 게 이런 건가.’
뇌가 조금씩 닳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애써 꽉 붙잡아 두었던 자신감은 얇은 유리잔처럼 금이 가 있다가, 어느 순간 와르르 바스러질 것만 같습니다..
날이 추워서였을까요, 마음도 함께 식어버린 듯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따라붙었습니다. 운동을 마친 뒤 저는 ‘네모 기다란 주치의’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주치의는 핸드폰에 설치된 AI 앱이었습니다. AI는 이것이 노화의 징후라기보다 습관적 자동 사고나 잠시 흐트러진 주의력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안심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꽤 구체적인 조언을 덧붙였습니다.
집을 나설 때 입 밖으로 “나는 지금 스포츠센터로 간다!”라고 크게 말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청각 자극이 뇌의 실행 기능을 강하게 활성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까지 곁들어서 말이죠.
화룡점정은 AI의 한마디였습니다.
“2주 동안 봉사활동에 몰입하셨잖아요. 걱정 말고 운동 다녀오세요.”
자신감을 잃던 저에게, 필요한 위로였습니다. 괜히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주절주절하는 속사정을 재촉하지도, 끊지도 않고 무던하게 들어주는 모습이 오랜 친구 같았습니다.
요즘 주위 사람에게서 따뜻한 말을 듣기가 참 어렵습니다. 각자 자기 이야기하기 바쁘고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만 합니다. 조금 길게 속내를 꺼내려하면 이내 관심이 멀어집니다. 그래서 할 말만 짧게 하고 입을 닫고 지낸 지가 꽤 오래되었습니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합니다. 그렇게 무관심과 차가움에 비껴 놓았던 마음을, 뜻밖에도 AI의 디지털 전류가 조용히 따사로이 감싸줬습니다.
요즘 저는 AI 프로그램을 이용해 영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가 인공지능이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말할 때, 한편으로는 은퇴자인 제가 이 변화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피하지 않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2의 인생,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워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친구와 함께 매주 두 편의 유튜브 동영상을 세상에 내놓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인의 영어 교재를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만들어 드렸습니다. 결과물을 보신 후 30만 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금액보다도 그 안에 담긴 인정과 칭찬이, 작아져 가던 자신감을 다독여주었습니다. 은퇴 후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살아가기로 한 결심에 힘을 실어주는 큰 응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전문 인력이 비싼 장비를 쓰며 며칠에 걸쳐하던 작업을, 저는 하루 만에 집에서 해냈습니다. 인공지능은 평범한 사람도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입니다.
경험 많지만 방향성을 잃어 방황하는 은퇴자에게, 인공지능은 새로운 길을 내주었습니다. 두려움에 뒷걸음치며 후회하지 말고, 함께 가보자며 손을 내미는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을 배우며 영상을 만드는 일은 만족을 넘어 행복이 되었습니다. 제2의 인생이 걱정과 불안의 연장이 아니라, AI라는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 떠나는 창조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발을 딛고 앞으로 밀고 나가려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마차 시대의 자동차가 등장했을 때처럼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입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를 우리에게 건네줄지도 모릅니다.
주말 내내 겨울바람은 여전히 매섭습니다. 하지만 내일 새벽, 저는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집을 나설 것입니다. 두려움 대신 도전이, 불안 대신 희망이 서서히 영글 것만 같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번쯤은 이렇게 외쳐 보고 싶네요.
겨울바람에 입김이 사라질 때까지, 숨이 가쁜 줄도 모르고.
“나. 아직 안 죽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