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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Jan 04. 2020

12월, 사회를 이끌고 나아가는 사람의 약속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명왕성에서>

이 땅의 작가들이라면 무릇 그랬을 겁니다. 생때같은 아이들이 바다에 빠졌는데, 국민을 구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던 국가가 먹통이었을 때, 무능한 것을 넘어 비열하고 파렴치할 때, 말이 업인 사람들이니 그 비통과 분노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무슨 말을 해도 한참 모자라거나 어그러지는 사태 속에서, 온전한 말 대신 단말마의 소리들이 차라리 진실이라고, 그걸 또 말로 하다가 죄스럽고 누추해져서 차라리 침묵하기도 했을 겁니다. 


연극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박상현도 그랬을 겁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향해 가족, 친구, 선후배, 시민들이 남긴 전언들을 대사로 삼은 이 희곡이 그 결과입니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응축돼 있는 지난 5년의 곡절은, 부서져 있으나 조심히 얽어 또렷한 형상입니다. 그것은 어떤 예술가가 최선을 다해 해낸, 나름의 기억이고 의지이며 약속입니다.  

작가는 2014년 겨울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 “잊지 않겠다. 반드시 연극을 통해 세월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약속들, 서로가 서로에게 죄스럽고 누추하게 건넨 그 낱낱의 약속들이 그나마 불빛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끌며 나아가는 그런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을 이 희곡은, 이 작가의 마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사랑하는 아들 

너무나 보고 싶은 내 새끼 

너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그래도 매일매일 꿈 속에서 나타나 얼굴을 보여주더니 요즘은 하루 걸러, 이틀 걸러 보이네. 거기서 생각해보니 엄마가 섭섭하게 해준 게 있던 거야? 어젯밤 꿈에서도 가물가물 하길래 이렇게 와밨단다.

엄마가 비실비실해서 늘 걱정했던 내 새끼. 엄마가 몸이 약해 못 해준 게 많아. 미안해 아들. 

엄마 약 열심히 먹고 있어. 광화문에 나가서 싸움도 열심히 하고 있고. 아들이 심청이 돼서 엄마 눈을 뜨게 해줬네. 세상을 보는 눈을...

어제는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의경 애들하고 밀고 밀리고 드잡이를 하다가 안경을 낚아챘는데, 얼굴을 보니까 아들만큼이나 어리더라구. 그래서 안경 돌려줬더니, 걔가 "미안해요..." 그러잖아. 

세상이 많이 변했어. 교회도 변했고.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잖아. 

내 아들, 우리 새끼들이 어떻게 갔는지...

네가 그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았는지...


소녀 어머니가 말씀을 맺지 못하시네요. 우리 아들, 어머니 꿈에 열심히 찾아가 뵈어야겠어요.(36~37)


친구야, 아직도 나는 둥근 창 안에서 헬기 구조 바구니에 오르는 나를 보던 너의 눈을 지울 수가 없다. 이 팔목에 난 칼자국은 벌써 세 줄, 담배빵은 수도 없고, 약도 수없이 삼켰고, 집에 있는 날보다 입원해 있는 날이 더 많았단다. 그런 나날로 4년이 지났다. 그래도 나 뒤늦게 공부 시작했어. 입시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 말고 내년 말쯤 목표로... 내가 그래도 중학교 때는 우등생이었으니까 머리는 있는 거 아니겠니.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네 눈이 사라지지 않아. 문득문득 떠올라... 내 손에서 미끄러지던 네 손목... 창 속의 네 눈... 차라리 내 눈을 찌르고 싶도록...


소년 친구야, 그 눈, 네가 보았던 내 눈은 이제 없어. 내 눈은 이미 물에 녹고 물고기에 쪼이고 진흙에 섞여 이제 거기 없어. 어디에도 없어. 네 마음 속에도 없어. 없는 거야. 그러니 눈 찌를 생각하지 말고 다시 들여다봐. 거기, 네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64~65)


소년 아빠, 이제 저는 자유로워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곳, 우리 집에도 갈 수 있고, 여행하시는 아빠, 엄마도 따라갈 수 있죠. 우리는 어디든 가봤어요. 태평양이든 히말라야 높은 산이든, 그리고 유럽의 스페인, 이태리, 크로아티아, 또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 오로라 일렁이는 그린란드... 그러니 저를 위해 여행하지 마시고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소녀 저희는 별에 있다고 했잖아요. 영원히 팽창하는 이 우주를 따라 끝없는 여행을 시작하고 있답니다. 지구에서 여기는 아득히 멀지만, 또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가 없어요.(중략)


어제 목포에 갔다 왔어. 이제는 배가 바로 섰단다. 바로 선 배에 겨우내 내린 눈이 녹아 물이 떨어지는 거야. 배가 우네, 그랬지. 배가 뉘우치는 건가. 아니 그건 너희들의 눈물이던가. 내 가슴에 내리는 눈물인가. 엄마는 아직도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죽은 이는 넌데 내가 한없이 밉고 불쌍한 거야. 이렇게 빈 가슴에 싱싱 찬바람만 찾아오고, 너는 이제 꿈에도 오질 않는구나. 바다에서 돌아온 너의 시계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는데 엄마의 시간은 큰 못이 박힌 것처럼, 고르게 뛰지 않는 심장처럼, 겨우겨우 헐떡거리는구나. 너를 따라갈 때를 놓친 걸까. 쇠로 만든 그 커다란 배도 세우러이 흐르면 녹이 슬고 삭아서 없어질 테지만 이 정, 이 한은 지워질 건가. 다 살고 할머니로 쪼그라들어도, 노망에 치매에 껍데기만 남아, 그 정, 그 한, 몸 안에 남아 있지 않아도 따로 어디에 남을 건가. 얘야... 얘야...(66~68)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11월부터 멈포드의 서재는 동네 서점 '니은서점'@book_shop_nieun과 함께 엽니다. 3개월간 진행하는 시즌 1의 주제는 '타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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