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서른 살 야곱은 키도 크고 잘생겼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앞에 있는 사람의 귀에 닿을 수 없다. 말은 느릿느릿 입안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한다. 그의 눈은 앞을 보지만, 앞에 있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는 않는다. 그 사람 너머 어디쯤을 본다. 그 어디쯤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야곱은 열심히 일한다. 쉬는 날도 쉬지 않고 나와서 일한다. 웃지 않고 울지도 않고 힘들다는 말도 좀체 하지 않는다.
야곱은 호텔에 산다. 하루의 대부분을 호텔에서 산다. 하지만 호텔의 룸에서는 야곱을 볼 수 없다. 호텔 지하에 있는 물품 보관소에서 볼 수 있다. 필요한 물건들을 룸에 날라 주며 100만 원이 넘는 월급을 받는다. 일이 끝나면 바로 호텔을 나가 집으로 돌아간다. 호텔과 집 외에는 좀처럼 다른 곳을 가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웃지도 않고 호텔과 집 밖에 모르는 야곱도 웃으며 따라가는 곳이 있다. 회식자리다. 회식이 있으면 야곱은 좋아한다. 회식에는 꼭 참석을 한다. 하지만 대화는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눈치도 보지 않고 그저 우걱우걱 음식을 입에 넣는다. 야곱은 허기를 입에 넣는 것 같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많이 먹는다.
그는 긍정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다.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기에 더 눈에 띄지만 누구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게 살아가려 한다. 그런 모습에 나름 염려와 간섭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에게 뭔가 기술이라도 배우던지 더 돈을 많이 받는 막일라도 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라 말한다. 야곱은 그 사람 너머 어디쯤을 보면서 “네”라고 조그맣게 대답할 뿐이다. 사람들의 말이 야곱의 귀에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야곱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취하는 방은 호텔 룸에 있는 화장실보다 조금 크다. 한 벌 옷을 일주일 동안 입고 늘 몇 개의 같은 옷을 일주일씩 돌아가며 입어 허름한 모습이, 여름에는 힘겨운 물건을 나르는 공장 노동자 같아 보이고, 겨울에는 북한 사람 같다. 가끔 저녁 뉴스 시간에 나오는 추운 겨울 거리에 서 있던 북한 사람 같다. 야곱의 작은 방에는 그 흔한 TV가 없다. 작은 라디오와 비슷한 옷들이 걸려있는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옷장, 밥솥과 몇 벌의 옷이 걸쳐있는 작은 옷걸이가 전부다. 방구석에는 밥상 겸 책상으로 쓰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 위에는 작은 사진이 한 장 놓여있다. 작은 건물을 배경으로 비슷한 표정의 수십 명의 아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건물 입구에는 아이들에게 가려진 채 “... 육 원”이라는 간판이 언뜻 보인다.
야곱의 세상은 좁고 작고 낮고 단순하다. 머릿속에는 몇 가지 과거의 기억만이 남아있다. 오늘 일을 하다 들은 잔소리 몇 개만이 빈방에 울리는 라디오 소리처럼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피로한 몸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떨쳐버릴 수 없는 친구 같다. 야곱은 자신이 이 지구에 왜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생각도 못한 채 이곳에 왔듯이 생각도 못한 때 다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야곱은 방바닥에 늘 깔려 있는 이불 위에 눕는다. 언젠가 이불을 깔았지만 이불을 갠 적은 없다. 이불은 방바닥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야곱도 이불과 하나가 된다. 야곱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간다. 이불속으로 방바닥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야곱에게는 잠에 빨려 들어가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꿈에 야곱은 호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 위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야곱은 무릎을 꿇고 어릴 때 배운 주의 기도를 외우기 시작한다. 잠든 야곱의 표정 없는 얼굴에 아주 잠간 미소가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