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통의 순간에는 항상 어울리지 않는 찬란한 빛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그때, 문득 이상한 느낌이 이마를 밀어 올려 고개를 들었다. 빛나고 동그란 금속성 물체가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저편 어두운 방 안에서 나타는 그것은 환한 태양 아래 앉아 있는 내게로 천천히 날아왔다. 그 짧은 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졌는지, 아니 그렇게 느린 시간으로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살다 보면 가끔 만나는 특별한 순간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고 오랫동안 기억나는 찰나 같은 순간이었다.
지나간 시간들을 모두 균일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찰나 같은 고통 또는 기쁨의 점들이 엉성하게 찍힌 얇고 하얀 도화지와 같다. 나는 점과 점을 이어가며 뭉툭한 연필로 선을 긋는다. ‘자, 이제 모든 것들은 연결되었어'라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점과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하얀 도화지와 어울리지 않는다. 아이가 장난쳐놓은 낙서같이 보인다. 지나간 기억들은 기억 자체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나는 기억들을 만족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늘 그것들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기억 하나가 담겨있는 점들은 엉켜있는 작은 매듭과 같아서 나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풀어가며 숨겨진 나만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노력에 늘 좋은 성과를 얻지는 못한다. 의미를 찾지 못한 것들에는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 넣어 억지로라도 의미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내게 남은 기억은 그것이 원래 그 기억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이야기인지 불분명하다.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들은 만들어진 것이었고 꿈이었겠거니 생각한 것들은 사실이었다. 기억과 의미는 뒤엉켜버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다만 나는 그 혼돈 속에서 내 맘에 드는 것들로 나의 기억을 구성할 뿐이다.
그때 오후 햇살은 이상하게도 느리게 내려왔다. 우주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라고 하지만 가장 느린 것도 빛이다. 태양으로부터 내려온 빛들은 공간에 얇은 빛살을 뿌리고 있었다. 마당 한편 작은 탁상 위에 앉아 실로폰을 두드리는 내게, 날아오는 금속 쟁반 위에도 빛을 비추고 있었다. 이마를 밀어 올리던 이상한 느낌은 날아오는 금속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나는 피할 생각도 못하고 그것을 그 빛을 쳐다보았다. 느린 오후에 느린 빛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느리게 만든다. 이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마치 세상에서 처음 보는 물건처럼 신비롭게 만든다. 그것은 저 앞 어두운 방 안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다시 생각하니 그다지 즐거운 기억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비친 빛은 너무나도 신비로웠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금속 쟁반은 봄날 오후의 따사로운 햇빛을 반사시키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늘 보았다. 그것은 시내에 흐르는 물결에 있었다.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흘러가는 물소리는 정신을 멍하게 만든다. 흐르는 시냇물에 반사되던 빛들은 텅 빈 머릿속을 빛살로 환하게 채워 넣는다. 그 빛살은 재너머에 있는 방죽 저수지에도 있었다. 노을 지는 방죽에 앉아 바람을 맞으면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시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은 느려진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되는 황금 빛살들 뿐. 그 빛들은 모두 저 위 태양으로부터 내려온다. 뒷산에 빼곡히 들어선 무덤들에는 잔디가 깔려 있다. 봄 햇살로 따스하게 달구어진 무덤 위에 누워있다 보면 반쯤 감은 눈으로 하늘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빛은 마을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었다.
고통의 순간은 처절하고 고통이 지나간 자리는 처참하지만 그 순간에도 찰나에 비치는 빛이 있어 고통을 잊고 영원을 바라보게 해 준다. 이마에 남긴 상처와 가슴에 박힌 폭력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폭력은 몸에 새겨진다. 몸은 마음보다 똑똑하다. 마음은 그러려니 넘겨도 몸은 스스로 움추러든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기억 속에는 아름답고 따스한 빛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새겨진 빛의 흔적은 모든 고통의 순간이라도 웃음 지을 수 있는 아름다운 빛이 있음을 기억하게 해 준다.
기억의 순간순간은 풀을 수 없는 엉킨 매듭 같고 빛이 없는 어둠처럼 보이지만, 모든 고통의 순간에는 항상 빛이 있었다. 그 빛은 고통의 순간에 나를 영원으로 도피시켜 그 모든 것들이 피해갈 잠시의 위로와 혹은 영원한 희망을 준다. 날아오던 쟁반도, 날아왔던 방도, 그 방안에서 있던 사람도, 그때의 시냇물도 저수지도, 뒷산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 따사로운 오후 그곳을 비치던 그 빛은 여전히 맘과 피부에 남아있어, 지나간 것들에는 미소를 보내며 흐릿한 앞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음에 용기와 희망을 준다. 지금도 모든 고통의 순간에는 항상 어울리지 않는 찬란한 빛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