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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선 Dec 06. 2024

네, 면서기입니다.

문장위빙

112
 "죄송합니다만,...... 그런데 우리도 작은 것들을 숨길 수 있어야만 하지 않나요, 이해하세요? 살아가려면요. 우리 공간에서 혼자 소소한 일들을 할 수 있어야만 하지 않나요,.... 조용히 있고 싶다면 문을 닫을 수도 있어야 하잖아요...."

책, 고마운 마음


97 김 현 교수는 <천년의 수업>에서 '무늬'의 뜻을 가진 문文 자를 들어 인문을 '인간이 새겨 넣은 무늬'라 말했다. 그렇다면 공원은 그 마을의 인문학이면서, 우리 모두이자 각자의 인문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책, 네, 면서기입니다


같은 단어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 내고 나면 우선은 쓸쓸하다. 각자의 의미 안에 갇힌 개인이 쓸쓸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타인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는 전제 조건일 것이다.

책, 타인을 듣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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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이런 시절 내내 그녀는 자기 집에서 혼자 살았다.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며. 그리고 계속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고,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로 그 가을날이 왔다.

그전에는 괜찮았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22
 "마리 샤피에 씨가 곧장 부인에게 갈 겁니다. 20분에서 25분 정도면 도착할 거래요. 주치의에게도 알린다고 하네요."
"그냥요."

그녀는 '그냥요'를 '그래요'라고 말할 때와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24
 우리는 부엌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나를 붙잡고, 작은 보폭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녀가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나쁘진 않구나...."

하지만 바로 그날부터 미쉬카 할머니는 혼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36
 그녀는 뒤쪽에 있는 아파트 문을 닫는다. 수백 번도 더 닫았던 문이지만, 오늘이 마지막임을 그녀는 안다. 자신이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리고 싶어 한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안다. 수백 번 했던 이 행동들을 더 이상 할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닻줄을 풀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41
 대화는 줄어들고, 의례적이 되고, 내 마음과는 달리 공허해지기만 한다.....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어서. 할머니는 도리스 레싱, 실바아 플러스, 버지니아 울프의 책들을 읽었고, <르몽드>를 구독했고, 비록 머리기사뿐일지라도 매일매일 그날 치 신문을 훑어보던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50
나는 그들이 결사적으로 싸울 때,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나는 그들의 더듬거리고, 떨리고, 망설이는 목소리가 좋다. 나는 그 목소리들을 녹음한다. 그렇다, 정말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부분적으로 녹음한다. 첫 만남부터. 내겐 매우 작은 디지털 녹음기가 있는데, 그 안에 십여 개의 파일들이 들어 있고, 그것들은 폴더별로 구분되어 있다.


67
그녀가 나를 관찰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 미쉬카 할머니, 이젠 해야 해요! 잘 들어보세요. 골동품상, 음반상, 서적상, 고급가구상.... 이 단어들을 총칭하는 말은 뭘까요?"


"사라짐?"

96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린다.
나를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뜨개질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하는 척도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기다리는 것도 온전하게 하나의 일이 된다.

114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도.

언어가 없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126
 나는 언어치료사다. 말과 침묵, 말해지지 않은 것들과 일한다. 책, 고마운 마음, 델핀 드 비강



8쪽
 면사무소 문이 열린다.
꽃남방 할머니 다섯 분의 모습이 결연하다. 왠지 모를 긴장.....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면서기가 으뜸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면 바로 '어르신들께 초연하기'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를 내미셔도, 전화기를 고쳐달라며 빤히 쳐다보셔도, 딸이 왜 자식이냐 우기셔도, 왜 오셨는지 기어이 말씀을 안 하셔도, 며칠 전부터 입맛이 없고 기운이 빠지고 무릎도 더 쑤시고를 늘어놓으셔도 결코 당황해서는 안 된다.

10
 <고마운 마음>은 프랑스 작가 델핀 드 비강이 인간관계를 주제로 쓴 3부작 소설 중 두 번째 작품이다..... 미쉬카 할머니는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교정교열사로 적확한 언어를 구사했고 늘 책과 신문을 읽어온 그에게서 단어와 문장들이 손 쓸 수 없이 빠져나간다..... 할머니 곁에 마리가 있다. 어린 시절, 홀로 감당해야 했던 아픔을 친절히 안아주었던 그다. 그 고마운 마음으로 자라고 살아냈으니 마리는 미쉬카 할머니를 홀로 둘 수 없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던가? 충분하게 전했던가? 델핀 드 비강은 계속해 찾아오는 이 질문으로부터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1
 한 달을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하고 어제 퇴원하셨으나 신기하게도 지난주에 직접 목욕표를 찾아가신 복동 할머니가 남기고 간 세 글자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힘도 좋으시네. 삐뚤빼뚤 꾹꾹, 이름 석 자 소중히도 눌러쓰셨다......호통치듯 소리쳐야만 들을 수 있는 우현 할아버지는 자신의 고된 세월을 받은 이들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어보았을까? 해결해 드린 것도 없으면서 뒤늦은 질문들이다.

94 초록색 인문학
....면사무소 뒤편에 작은 공원이 있다. 5분이면 둘레를 돌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작은 공원. 13년 전, 그 공원에 누군가 죽어 있는 것 같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민원 받은 면서기라면 출동부터 해야 하는 법..... 공원은 우범지역이었다. 밤이 으슥하면 어린 담뱃불을 외면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화장실은 대부분 잠겨 있었고 열려 있으면 불쾌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이 공원엔 사람들이 있다. 이른 아침이면 학교와 일터로 향하는 이들.... 느린 걸음으로 도착한 백발의 어르신... 주말이면 청소년들이 벼룩시장을 열고, 긴장으로 주중을 산 이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가족, 친구와 함께 느슨한 시간을 보낸다.

95
 <도시의 공원>에 실린 18편의 글과 112장의 사진으로 세계 곳곳의 공원을 산책할 수 있다..... 이집트의 소설가 아다프 수에이프는 카이로의 알 아자르 공원을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 기품과 선택과 전망을 보여주는 곳'이라 말한다.... 언론인 조너선 알터는 시카고의 런던 공원 덕에 집과 유치원을 오가던 '세계가 확장'되었던 순간을 회상한다.

96
 공원은 특별한 곳이다....... 누구에게나 열린 널찍한 공간은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임을,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면서 동시에 사색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홀로일 수 있는 순간을.... 내어준다.

네, 면서기입니다, 김우주



같은 단어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 내고 나면 우선은 쓸쓸하다. 각자의 의미 안에 갇힌 개인이 쓸쓸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타인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는 전제 조건일 것이다.


책, 타인을 듣는 시간,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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