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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장위빙

문장위빙

어린이라는 세계

by 홍선




111쪽

다음 날 나는 언니가 보낸 근대를 넣어 된장국을 끓였다. 뭐, 이 시국에, 동생이 굶어죽기라도 할 줄 알았나, 혼자 입을 비죽였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이 글을 쓰는데도 눈앞이 그만 뿌예진다. 아니, 원래 하려던 말은 이런 게 아닌데. 동생들도 억울하다는 거랑, 그러니까 자매, 형제 어린이들 사이좋게 지내게 도와 주자는 말을 쓰려던 건데 왜 눈물이 나지. 이번 글은 아무래도 잘못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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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춘기를 지나 5년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언니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다. 가진 재주도 취향도 너무 달라 공통의 화제가 없는 데다, 옷 입는 스타일마저 서로 달라서 다툴 일조차 없었다. 언니는 의상학과로 진학했다가 한지 공예 작가가 되었다. 나는 국문학과를 선택했고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독서 선생님이 되었다. 그렇게만 보면 교차로가 하나도 없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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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니는 등굣길에 친구들을 만나면 나더라 앞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언니 옆에서 걷고 싶었다. 언니는 친구들과 걷고 싶고, 아마도 마음 같아서는 나를 떼 놓고 가고 싶었겠지만 엄마 말씀은 들어야 하니까 앞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래 놓고 언니와 친구들은 나에게 들리지 않게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렸다. 그게 얼마나 원통했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언니에게는 동생이 귀찮았던 순간으로 기억되겠지 싶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언니는 아예 생각도 안 난다고 했다. 그 점이 더욱 원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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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 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 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느 집 넓은 거실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환상 아닐까.


(생각위빙) 독서 수업을 할 때, <드림하우스, 유은실, 문학과 지성사> 책을 읽을 때 비슷한 질문을 열세 살 아이에게 한 적이 있다. 과연, "드림하우스"는 보름달가슴곰 '보람이네'에게 드림하우스일지, 그것을 보고 위화감을 느끼는 시청곰은 없을지, 또는 어떻게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지를 물어 보았다.
아이도 알고 있었다. 시청률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보람이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다른 시청곰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 또, '품위'라는 글자를 가슴에 품은 '보람'이를 불평하는 시청곰들의 '특별한 불행'을 바라는 편견어린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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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똑같은 글인데 읽는 사람에게 그려지는 세계는 모두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글이 무거워요. 한 글자 한 글자가 무거운 거예요"라고 했다.

글자를 익히고, 글을 읽어 내 것으로 만들고, 어려운 글자를 써서 연습했던 나는 지금 글을 무겁게 귀하게 여기고 있을까?(생각위빙)그 글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드러나므로, 마음이 드러나므로, 나에게 와 닿는 지점이 달라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더라도 삶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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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르트르 어린이도 글자를 익혔다고 해서 바로 읽기의 세계로 돌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호를 읽는 것과 의미를 아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심자인 어린이들은 책을 소리내어 읽다가 머뭇거리는 순간이 자주 있다.

아람이는 혼자 힘으로 책을 읽게 된 뒤에도 '우스꽝스러운'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꽝'을 '꽝'이라고 읽지 못했다. 문맥상 '우스운, 웃긴'같은 말을 기대했을 텐데 갑자기 '꽝'이라니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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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 안데르센 동화 <엄지공주>에 나오는 표현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믿기지 않았다. 한 글자씩 짚어 가며 발음하고 금기를 어긴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게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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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감정들을 곱씹으며 집에 갔다가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어린이는 다시 놀이터로 달려 나간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 어린이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지금 몇 시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고 자기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그 순간이 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한다. '놀기'에는 아주 큰 소득이 있다.

(생각위빙)'누구야'부르던 시절이 있었지. 난 배고파서 부르기 전에 들어간 거 같지만 말이다. 동네에 어떤 애가 축구를 잘 하고, 어떤 애는 나가면 만나고 어떤 애는 집에 찾아와 '놀자'하던, 바다도 산도 동네도 있는 곳에서 자라서 좋다. 그 시절의 문중 사람들이 모인 그 '솔밭동네'가 참 부담스러웠는데, 그런 부분들이 나의 일부가 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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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게......그 .....피에로 있잖아요. 그런 게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안 좋아하는데."


그러게, 피에로! 피에로를 잊고 있었다. 어린이와 놀아 주는 척하면서 살아남아 은근히 겁만 주는 캐릭터. 나는 지금까지 피에로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른도 어린이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피에로가 좋지 않다. 그런 게 왜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서 일단 율무에게는 '악취미'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다. 조금은 설명이랄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생각위빙)피에로는 피에로가 되고 싶었을까. 난 '조커'영화를 보면서, 첫째 아이가 조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도하기도 하면서도.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편견의, 차별의 시초가 된다는 것도 씁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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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이 어린이들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 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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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소리는 '재미있는 수업'이라고 생각해 손수건 사용법을 등을 가르쳤는데, 어린이들은 전혀 웃지 않고 귀 기울여 수업을 들었을 뿐 아니라 수업이 끝나고는 깜짝 놀랄 만큼 열광적인 박수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몬테소리는 어쩌면 자신이 "어린이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더러운 코 때문에 끊임없이 야단맞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대로 코 푸는 방법을 몰라 애를 먹어 온 것이다. 어린이라고 해서 코를 훌쩍이며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니고 싶을 리 없었을 테니, 배움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했으리라는 이야기였다.

(생각위빙)아이뿐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장애가 생겨서도 병에 걸렸어도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하는 지점이 있다. 없으면 있다고 가정해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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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게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생각위빙)아이를 키울 때 교육철학서를 십여 권을 읽은 후에 '그만 읽자'하고, 나에게 맞는 책을 기준으로 나도 '착하네'라는 말을 쓰지 않고 키웠다. '위계질서', '말 잘 따르기' , '순종하기', '생각하지 않기'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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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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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 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 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7

글을 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 시대가 시작되었다. 독서교실도 여러 달 쉬어야 했다. 나는 블로그에든 신문에든, 매주 글을 쓰는 덕분에 염려와 우울을 달랠 수 있었다.



어떤 글은 쓰기 전부터 눈물이 솟았고, 어떤 글은 쓰다 말고 혼자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어린이들의 진솔한 모습 때문이지 모르겠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늘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