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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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변모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을 함께 다룰 때 더욱 쉽게 이해하고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한 예술을 가장 섬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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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과 미술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썼지만 여러분이 어떤 것도 외우거나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음악을 듣듯이 느끼기를 바란다. 결국 마음을 이끄는 것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 느낌에 이끌려 이 책의 페이지를 덮을 때쯤엔 여러분에게 음악과 미술이 있는 삶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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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00년경. 온화한 지중해의 작은 항구도시들로 이루어진 고대 그리스에서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마음껏 누렸다. 고대 이집트는 사방이 모래로 둘러싸여 안전하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폐쇄적인 사회였고, 그들의 왕이 말하는 것이 곧 법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되었다. 그러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사방이 탁 트인 그리스는 다양한 집단과 교류하며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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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30년경. 그리스 북쪽에 위치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대 그리스를 정복했다. 이에 더해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지금의 중동이라 할 수 있는 동방의 나라까지 진출해 대제국을 건설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했다. ......
.......헬레니즘은 상업이 발달하여....부유한 상인들이 거액의 값을 치르고 작품을 구매하는 시기였다. 좋은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오늘날의 명품 짝퉁처럼 복제품이라도 갖기를 원했다.
이제 예술가들은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구매자의 눈에 띄기 위해 인간의 외양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내면까지 깊이 있게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므로 비례와 균형을 중시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조각과 달리 헬레니즘 조각상은 꾸밈이 많고 화려하며, 고통, 절망, 분노 등 인간의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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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세력을 키워가던 기독교는 392년에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었고, 이교도 숭배가 일절 금지되었다. 이후 서구 세상의 모든 것이 기독교의 발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국교로 공인되기 전까지 로마의 황제를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받아왔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들은 기독교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포세이돈, 제우스, 아테나 등 그리스 신을 표현한 조각상들도 이교도의 것으로 여겨 대부분 파괴했다.
......이때부터 유럽의 거의 모든 미술은 예수나 성모 마리아,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 일색이 된다. 화려한 미술은 금지되었고 예배를 위해 꼭 필요한 만큼의 단순한 표현만 허용되었다.
특히 중세에는 기독교의 보급을 위한 모자이크화가 많이 창작되었다. 금빛 색채가 주를 이루는 모자이크는 교회당을 장식하며 속세와 구분되는 신성함을 강조했다.
46.47
중세의 교회 음악을 대표하는 것이 그레고리안 성가이다. 이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교황이자 교회학자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년)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성가를 집대성하여 모든 교회가 같은 의식에 같은 성가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천 년에 이르는 중세시대에 전례음악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예배에서 불리고 있다.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면 머릿속의 걱정들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음악이 주는 포근함에 휴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화려한 표현이 금지되었기에 음악은 오르간 소리와 인간의 목소리만으로 화음을 펼쳐야 했고, 그림들 또한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려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 시대의 예술은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위안을 준다. 이것은 종교의 힘이 아니다. 종교가 예술의 힘을 빌린 것이다. 이런 음악을 들으며 조용한 공간에 앉아 있노라면 그 종교가 무엇이라도 믿게 되지 않을까. 더군다나 1500년 전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64.65
<천지창조>의 제작 중 나온 유명한 대화가 있다. 작품의 제작에 지나치게 심혈을 기울이는 미켈란젤로에게, 그의 친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여보게, 그렇게 구석진 곳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인물 하나를 그려 넣으려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게 완벽하게 그려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이에 미켈란젤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알지."
진정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그의 노력에 비하면 약소한 것일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안다면,
당신은 절대 나를
천재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닥치기 쉬운 위험은
너무 높은 목표를 잡아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아서
성공하는 것이다. - 미켈란젤로
86
렘브란트는 자연과 닮게 그릴수록 자연과 멀어지며, 그림이란 작가가 의도한 바를 드러내어 붓을 내려놓을 때 마무리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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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를 포함하여 브람스, 쇼팽, 멘델스존, 슈만 등 우리가 좋아하여 많이 듣고 잘 알려진 클래식 작곡가들은 거의 낭만주의 시대에 분포한다.
이처럼 유독 이 시대의 작품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낭만주의 예술의 의도가 인간의 감정을 담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는 눈 앞에 보이는 외형만
그려서는 안 되며 자기 내면에
보이는 것도 그려내야 한다.
화가가 자기 내면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 - 프리드리히
123
이 시점부터 예술사조에는 시대라는 명칭이 붙지 않는다. 낭만주의를 포함해 이전의 예술사조는 전 유럽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다음부터는 한 사조가 시대를 독식하지 않고 다양한 성격의 예술이 공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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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친구였던 작곡가 에릭 사티의 음악은 이전의 클래식보다 쉽게 작곡된 듯하며 오늘날 카페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흔한 선율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당시에 사티의 음악은 미술의 대변혁과 마찬가지로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사티는 현대예술의 개념을 음악으로 시도한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음악과 미술이 형식과 구성요소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사티는 자신의 음악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으며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공언했다. 더불어 음악의 거대주의를 거부하며 최소한의 음으로 작곡했고 어떠한 음악도 흉내 내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이전에 작곡한 음악조차 닮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정도였다.
즉 사티는 예술의 고전적인 개념 자체를 거부했다. 사티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작곡가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선 인물인지 느낄 수 있다. 오늘날 그는 미니멀 음악, 혹은 아방가르드 음악의 시초로 칭송받는다.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을 했던 사티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그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요구를 내걸기도 했다. 자신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곳은 그저 카페 안의 그림이나 테이블, 혹은 공기처럼 그냥 존재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가구 음악'이라고 부른다. 이는 누구나 존재한다는 걸 알지만 귀 기울이거나 신경 쓰지 않는 음악을 의미한다. 오늘날 비지엠의 개념이 사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다시 사티의 음악을 들어보면 이 단순한 음악을 작곡하기 위한 그의 단순하지 않은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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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프랑스 유학 시절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몬드리안의 작품을 실제로 보고 의외의 실망을 느꼈다. 그의 작품에서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작품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조금 오기가 생겼다. "나는 왜 저들처럼 느끼지 못하는 걸까? 싫어하더라도 몬드리안에 대해 알아보고, 그때도 싫으면 정말 싫어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몬드리안의 작품과 생애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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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을 보고 듣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예술을 알아가는 것은 곧 타인을 이해하는 일과 같다.
음악이 흐르는 미술관-윤지원-중략 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