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중이 아니라!
병원의 내 방은 그다지 어수선하지는 않습니다. 정리가 조금 되어있어서 손만 대면 원하는 것을 대략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당 기간 찾지 않았던 것을 따지자면 앞으로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바로 처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여서 놔둔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생각 외로 반가운 물건이 하나 나왔습니다. 다름 아닌 도장입니다. 게다가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개나 나왔습니다. 인감도장은 따로 보관하고 있기에 진료실에서 고급 목도장이 세 개나 나오는 일은 분명 흔치 않은 상황입니다. 젊을 때 파놓은 뿔도장, 각기 서체가 다른 목도장 두 개. 개업했을 때 은행 업무나 진단서 발급에 사용한 기억까지는 있지만 점점 인증서로 대체되는 상황, 개업을 접고 봉직의로 들어오면서 사용이 중단된 모양입니다.
이쯤 되면 인주도 있겠다 싶어 서랍에 깊이 손을 넣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구석에서 나무곽에 있는 인주도 보입니다. 도장(印)에 찍는 붉은(朱) 물감 재료라 하여 인주입니다. 다른 말로는 인육(印肉) 주육(朱肉) 인니(印泥) 도장밥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인주를 묻혀 서류에 도장을 찍는 순간 모든 계약이나 서류는 그 효력을 발휘하며 그에 따른 책임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두려움과 경외의 순간이지요.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도장 훔친다는 말은 굉장한 의미였습니다. 땅이나 집이 훌러덩 날아가기도 하니까요. 이 위력은 제가 젊을 때까지도 상당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보증제도가 사라지고 대출의 범위도 능력에 따라 정해지고 나서는 무분별한 경우는 많이 줄었지만, 도장 찍었다는 말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 조그만 도구 하나에 내 신용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이제는 형태만 달라졌을 뿐 나를 믿을맨으로 뽐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으로 믿어달라 스스로 소리쳐봤자 믿을 사람이라야 내 가족 아니면 내 불알친구 정도? 하지만 그마저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떨어진 신용을 올리는 일이야말로 세상 어려운 일입니다.
이자 연체하지 않기, 공과금이나 세금 제때 내기, 이런 간단한 업무 이외에도 ‘하겠습니다’ ‘하지 않겠습니다’가 제대로 먹히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나를 과대포장하고 부풀리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내 말이나 행동에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고 신뢰를 보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아도 보편적 상식 정도에서 충분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계약서의 장수가 늘어날수록 내용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상대를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빨갛게 찍힌 도장의 무게는 그냥 조각목의 문양이 아닙니다. 약간의 고리타분함은 있을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왕실의 국새 무게는 조선 팔도 이상의 무게로 보면 될 듯합니다.
내 신용의 무게는 얼만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