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앙에 우리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좋다! 라는 명제가 성립하려면 무엇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어릴 적 막연하게 어른이 되고 싶다던 바람대로 충분한 어른이 되었지만, 사실 여태껏 어른이라는 감투가 무엇에 좋은지, 어디에 좋은지 잘 모른 채 쌩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나이대의 사람들이 그랬듯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존중해주는 척이라도 해 주는 젊은이가 지천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소위 요즘 것들은 자칫 너희들이 해 준 게 뭐 있느냐는 타박만 하지 않아도 참 다행입니다. 물론 100%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세태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나보다 나이가 제법 많은 어른에게 이렇게 저렇게 대해야 한다는 가이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릴 적 배웠던 도덕 시간이 사회에도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한때 공자(孔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던 그 공자를 숭상하는 시대도 아니며, 그를 외치다가 자칫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인 21세기의 기성세대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 배후에는 라떼 세대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앞뒤 맥락도 없이 부어대는 잔소리는 젊은이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기는커녕 비수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만 모릅니다.
과연 중년 이후의 세대는 어떤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X 세대, MZ 세대 등으로 세세하게 분류되는 젊은이에 비하면 참으로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나타나는 어두운 면의 상당 부분은 모두 X86 세대가 일궈 놓은 부산물 정도로 비하하는 그 배후에는 젊은이들의 말하지 못할 불만이 있을 뿐입니다. 과연 우리 세대들이 남겨놓은 유산에는 모조리 부정적인 것들만 존재하는 걸까요?
어느 햇살이 좋은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학원에서 끝난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습니다. 재잘거리는 소리. 까르륵대는 웃음이 너무 예뻐 아이에게 몇 마디 말을 걸었다가 순간 옆구리에 전기가 오는 줄 알았습니다. 아내가 보내는 무언(無言)의 제지 신호였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관심이나 대화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과연 그럴까? 의아했지만, 당시 아이 엄마의 표정이 생각나 그대로 수긍했습니다. 대다수가 그러하다면 그렇겠구나! 싶었습니다. 세태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겠구나 싶은 날이었습니다.
언론은 우리도 이제 장수(長壽)의 시대에 진입했다며 온갖 핑크빛 기사를 송출합니다. 노후를 잘 보내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싶다가도, 없으면 없는 대로 만들어 가며 살면 된다는 얕은 배짱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나이가 든다는 말은 곧, 근력이 떨어지고 관절이 성치 않으며 몸 안에 노인성 질환을 지니며 산다는 사실은 간과합니다. 인지 능력도 감소하고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어떻게 대비하느냐는 카테고리에 돈이나 경제적인 부분에는 큰 비중을 두지만, 건강이나 인지력의 감소에는 비중을 덜 둡니다.
이렇듯 경제력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합니다. 경제력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질병에 노출되어도 하다못해 약을 쓸 수가 있으며, 건강이 허락해야만 경제활동이 필요할 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cycle이 무너지면 일종의 악순환만 지속됩니다. 노년에 하루하루 다가서는 요즈음,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에 대처할 것인지 돌아보는 중입니다. 내 안에 스며져 있는 습관이나 버릇들이 나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 더 나아가 언어의 사용도 그렇지 않은지 궁금해집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아지면 어쩌나 싶지만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다 보면 멋진 노인이 되어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날을 꿈꾸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