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친숙해질

죽음에 관하여.

by 김욱곤
다운로드.jpg (이미지출처:네이버 블로그 머문자리)


누군가의 죽음과 맞닥트린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자주 접하는 일도 아니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태어나는 일도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누군가가 태어나고 보내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고 돌아가는 일이 경사이고 애사인가 봅니다. 나에게 생(生)과 사(死)는 역설적이지만 직업적으로 접한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그것도 상식적으로 아는 공간이 아니라 수술실에서 말입니다. 수련의와 전공의 시절부터 시작된 이런 만남과 이별은 전문의를 취득한 이후 다양한 직장을 거치며 계속됩니다.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난 생명들, 예기치 않게 수술 도중에 하늘 가는 길에 놓인 환자들을 보았고, 어느 날은 같은 공간에서 출생과 보냄을 동시에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럴 때마다 기쁨도 같이 나누고 의도치 않게 엄숙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표정부터 관리해야 하는 중압의 고통과 현실, 숨소리의 거침조차 죄송스러운 흐름 속에서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지시를 내려야 했습니다. 때로는 가족을 보낸 보호자 앞에서 고개도 숙여야 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노고는 그대로 묻혀 그대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내가 경험한 가족의 죽음은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다름 아닌 막냇동생의 죽음입니다. 백혈병을 넘지 못하고 동생은 하늘로 갔습니다. 아쉽게도 임종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처음 겪는 생소함이었습니다. 1976년의 일이니 만(滿)으로 치면 내 나이 14살이요, 동생의 나이는 꽉 채운 5살입니다. 덕분이라 해야 할까요?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의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길을 줄여보겠다고 결심한 그 직업이 오히려 죽음을 쉽게 접하는 걷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친척의 소천 이외에는 가족의 죽음과는 한동안 친하지 않았습니다. 친척의 죽음은 나에게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아쉽지만 덤덤하게 보내드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나는 60세의 중반에 들어서고 부모님의 연세도 90 언저리에 놓이게 되면서 죽음이라는 현실감이 우리 부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2026년 2월 6일의 기억은 아마도 내가 같은 일을 당할 때까지 영영 잊지는 못할 듯합니다. 이미 너 댓새 전에 미리 다녀온 장인어른의 얼굴은 마르다 못해 살갗만 살짝 덮인 거 같았습니다. 몸은 넉넉하게 잡아도 30kg을 겨우 넘겨 보였습니다. 가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지는 몇 달째이고 피붙이는 물론 평생 곁을 지키신 장모님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 시간은 차별 없이 제 속도로 흐르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2월 5일 오후에 뜬금없이 근무하는 병원의 원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내일 하루 대체하실 분을 구했으니 하루 쉬시고 어르신께 한 번 다녀오세요.’ 마음 깊은 배려를 감사히 받으며 못 이기는 척 내일 새벽에 다녀오리라 결심했습니다. 이미 친정에 내려간 아내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6일 새벽에 날마다 말씀 읽고 기도하는 시간보다 30분 더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3시 30분에 떠진 눈을 비비며 기도하려는데 이 날따라 기도의 입이 너무도 버벅거리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낑낑대다가 단 한마디만 하고 기도를 접었습니다. ‘주님! 제 장인어른의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큐티와 기도를 마치니 5시 20분. KTX가 몇 시부터 운행하나 앱을 보려고 핸드폰을 드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가셨대!’ 가족을 모두 보지 못하고 소천하셨답니다. 그 허망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그때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단어나 문장을 늘 생각합니다.

2026년 2월 8일 주일에 장인어른을 세종의 은하수공원에 모셨습니다. 화장하고 나니 그야말로 한 줌 정도인 그 몸을 땅에 고이 묻어드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영 이별했습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에서는 결국 천국에서 다시 뵈리라는 희망을 늘 가르치지만, 덕분에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지만, 육체로 뵙고 만나는 일은 이제 없어진 셈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억에, 사진에 남아있는 장인어른의 모습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일 것입니다.



2026년 2월 21의 새벽의 일입니다. 갑작스레 장인어른께서 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내와 내가 어느 야트막한 산에 올랐다가 열심히 하산하는 중이었습니다. 산의 입구쯤에 다다랐을 무렵, 생전 처음 보는 중식당이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가게 밖까지 쭉 펼쳐진 테이블에는 손님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음식을 놓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이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어른들 모시고 대접해 드리게 예약해 볼까? 맛집인가 봐!’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뒤 아내가 밝은 얼굴로 나왔습니다. ‘예약했어?’ ‘응! 예약했어.’ ‘잘했네!’

뒤돌아 가던 길을 가려는데 왼쪽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릅니다. ‘김 서방!’

옆을 보니 누가 봐도 장인어른이십니다. 환한 빛이 나는 은갈치 색 양복이 비단처럼 반짝거렸고 얼굴은 환했습니다. 마치 60대의 얼굴로 보였습니다. 넥타이인지 오른편 양복 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빛 배지도 달려있었습니다.

‘자네가 지금 몇 살이지?’

‘이제 예순다섯 됐지요.’

‘그래? 그럼, 나한테 자네는 내내 65살로 남아있겠네. 장가는 언제 들었지?’

‘스물여덟에요. 그리고 다음 해 스물아홉에 아기도 낳았고요.’

‘그래!~~~ 잘 있어. 잘 지내고 있어!’

그렇게 짧은 꿈을 꾸고 눈이 떠졌습니다. 그날 아내와 나는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렇게 안부를 전해주신 듯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마침,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내친김에 산소를 한 번 더 다녀왔습니다.





남은 부모님께서 어느 순서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부모를 보내드린다는 것, 그리고 자식으로서 이 세상에 남아 살아간다는 것!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감정인지 하나하나 배우는 중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아마 내 자식도 비슷한 가슴앓이를 하겠지요.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의 아쉬움과 앓이가 켜켜이 쌓여 무거움을 감당하는 연습을 하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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