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81년
때는 1981년, 예과 1학년의 여름방학을 맞았습니다. 내내 초중고의 여름방학만 보냈던 내게 대학생이 된 후의 첫여름방학은 경이롭기 그지없는 신세계와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엇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없었고 친구를 살살 달래서 어디를 놀러 간다는 약속도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년 선배이자 대학 입학 동기인 형 하나는 종강하자마자 다음날부터 소위 말하는 노가다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집 짓는 곳에서 벽돌도 나르고 흙과 모래를 퍼 나르는 일을 했는데 마침 개강 이틀 전까지 보장을 받아 거의 두 달을 일할 셈이었습니다.
개강하는 날 나타난 형은 익다 못해 옅은 초콜릿 빛 얼굴과 팔을 하고 강의실에 나타났습니다. 처음 며칠만 몸살로 끙끙 앓았을 뿐, 다친 데 하나 없이 두둑한 일당을 덤으로 받았답니다. 그 돈으로 뭐 할 거냐고 물으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응! 가다마이.”
당시 적당히 보기 예쁜 자주 색깔의 양복 한 벌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 색깔의 양복을 하나 갖고 싶답니다. 당시 고향에서 이름을 날리던 (자기 이름과 같은 상호의) 양복을 맞추고 나니, 10.000원인가 남더랍니다. 바람이 조금 선선해진 날부터 한동안 그 양복을 입고 다니더니 그마저도 아깝다고 잘 모셔두는 듯했습니다.
기억나는 다른 이벤트가 있다면 다름 아닌 미국의 자매학교 방문이었습니다. 며칠 일정인지도 기억나지 않고 어느 대학인지도 모르며 동부인지 서부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일정인데 아마 10일에서 보름 정도의 일정이었던 거 같습니다. 학교에서 주관은 하고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돈이 제법 컸으며 학교는 제반 스케줄 및 행정 업무를 맡아주었습니다. 우리 과에서는 내 앞번호의 친구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가 다녀왔는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방문기를 듣느라 매시간 쉬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하루는 방학 도중에 어머니께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가벼운 한숨을 쉬셨습니다. “집이 좀 풍족해서 이럴 때 미국 같은 데 한 번이라도 다녀오면 좋으련만!”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에 대해 어디에서 들으신 모양입니다. 아들이 그 혜택을 받으면 좋았겠다는 바람이었겠지만 현실은 마치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의 푸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권 내기가 그리 어렵다면서? 또 비자는 어떻고? 에이 못 보내겠다. 하지만 못내 아쉽고 안타까움은 많은!
지금도 저는 미국이라는 곳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간다고 해도 기껏해야 어느 특정 지역일 뿐이겠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마치 미국 전역을 다녀온 듯한 뿌듯함이 남겠지요. 지금 큰맘 먹고 미국을 여행한다 해도 그 비행시간이며 소요되는 비용 앞에서는 덥석 물만 한 용기를 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듯합니다. 설령 내 평생에 미국이나 유럽에 가보지 못한다 한들 그다지 아쉽지는 않을 것이지만, 뇌리 깊숙한 곳에서는 내내 열망은 남을 테고 마치 내 어머니처럼 내 아들에게만큼은 마음껏 누리게 해 주면 좋겠다, 싶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아르바이트가 산재한 요즈음 세태가 부럽기도 하고, 결혼 후에는 적당히 큼지막한 도시에 살아왔으니, 아르바이트도 마음만 먹으면 풍족하겠지만 1980년대의 부업 시장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지요. 그나마도 그런 꿈은 예과 때의 일이고 본과에 진입하고는 그마저도 꿈꾸기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 처한 내 본분에 알맞게 살자는 이 명제는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안 되고 도움마저 적절치 못하다면 본분을 다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런 처지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이는 거의 불가능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은데, 이에 맞추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찬찬히 돌아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