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를 문명화시킨 절세의 문신
아무리 황제(몽골제국의 칸)가 총애하는 자라고 해도 살인범을 싸고도는 자를 체포하는 일에 야율초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서슬에 두려워하는 관원들을 꾸짖어가며 그를 당장 잡아들이게 했다. 소식을 들은 오고타이황제(칭기즈칸의 셋째아들, 나중에 원 태종으로 기록 됨)가 기어이 대노했다.
황제는 야율초재를 당장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오고타이는 곧 그 일을 후회한다. 상대는 다름 아닌 아버지 칭기즈칸 시절부터 나라를 안정시켜왔던 대 정치가 ‘야율초재’였던 것이다. 드넓은 정복지에 통일된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의 공이 누구보다 컸다는 것을 현명한 오고타이는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은 황제는 곧 야율초재를 풀어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감옥을 나온 야율초재가 곧장 황제에게 달려온 것이다. 황제 앞에 선 야율초재의 얼굴엔 노기가 서려있었다. 그가 황제에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조정의 대신으로 폐하를 보좌하여 국정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신을 잡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신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문무백관 앞에서 신의 죄가 무엇인지 선포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신을 석방하라고 하시니 이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신에게 죄가 없다면 도대체 왜 잡아 가두라고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문제를 가볍게 뒤집는 것은 아이들 장난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야율초재의 태도엔 거리낌이 없었지만, 좌우에 늘어선 조정 대신들의 얼굴엔 식은땀이 흘렀다. 황제에게 대드는 범상(犯上)의 죄는 죽음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영명한 군주였다. 갑작스러운 야율초재의 호통에 얼굴이 붉어졌으면서도 그는 당장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내가 천하의 황제임엔 틀림없지만, 나라고 전혀 실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야율초재의 인물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고사다. 그만큼 야율초재라는 인물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의 기강이며 철저한 법질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통치자에겐 더욱 중요한 일이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관료에게도 가장 큰 덕목이었다.
갇혀있는 용도 언젠가는 승천한다
야율초재(耶律 楚材 : 1189~1243)의 가문은 본래 여진족의 나라 금(金)에 멸망한 거란족의 요(遼)나라 황족후예면서도, 대 학자였던 아버지 야율 이(耶律 履)는 금나라 조정에서 재상까지 지냈다. 그 역시 17세에 금나라에 출사하여 칭기즈칸의 군대에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北京)이 함락되었던 25세 때까지 금나라 조정의 벼슬살이를 했다.
금나라 조정이 몽골군의 기세에 쫓겨 남쪽으로 밀려나 수도를 변경(汴京: 지금의 카이펑,開封)으로 옮겼을 때, 그는 따라가지 않고 불교에 귀의했다. 가슴에 천하를 품고도 남을 의지가 활활 타올랐지만 이미 국운이 기울어버린 금나라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였지만, 글도 읽을 줄 알고 예의에 밝은 어머니 양씨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매진했다. 총명함을 타고난 야율초재는 도박이나 잡기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남들보다 빨리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청년기에 접어들 무렵 이미 그는 천문, 지리, 율력, 유학, 산술을 비롯하여 불교와 도교 그리고 의학, 점복 등에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악기연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이토록 문화적 소양이 높은 그는 한 번 쓰면 거의 고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문장력 또한 뛰어났다. 그의 이런 박학다식은 훗날 미개한 초원의 정복자들에 불과했던 원나라 조정에서 나라의 기틀을 세우게 되는데 훌륭한 기초로 작용한다.
연경을 장악한 칭기즈칸이 천하의 인재를 구하고자 물어보니 사람들은 모두 야율초재를 지목했다. 몽골군이 연경으로 들어온 이후 은둔생활을 하던 야율초재가 칭기즈칸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앞에 나아갔을 때가 칭기즈칸 3년인 1218년이었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멸망당해, 대대로 금과 원수지간인 요나라 종실후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야율초재를 처음 만난자리에서 말했다.
“요와 금은 대대로 원수였다. 그대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그대의 원한을 씻어주겠다.”
그러나 뜻밖에도 야율초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지난 일입니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저 역시도 금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어떻게 군주를 원수로 삼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칭기즈칸은 예상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인물됨을 간파하고는 만족해하며 당장 그를 등용했다. 야율초재는 인품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고상한 수염과 낭랑한 목소리, 준수한 자태 등, 모든 것이 칭기즈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그는 한어(漢語:중국어)와 거란어는 물론이고 여진어, 몽골어에도 두루 정통했다.
이후 칭기즈칸은 그를 ‘긴 수염’이라는 뜻인 ‘오도살합리’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갇혀있는 용이라도 언젠가는 승천하기 마련인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격변의 시대에 야율초재는 마침내 세상을 덮을 수 있는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귀순한 외국출신 문신이 무력만이 판치는 몽골의 군사귀족들 틈에서 위치를 굳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활 솜씨가 뛰어나 칭기즈칸의 총애를 받는 상팔근이라는 서하(西夏: 1032~1227년까지 중국 북서부의 간쑤성(甘肅省), 산시성(陝西省)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출신 장군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교만하게 말했다.
“지금은 무력을 사용할 때입니다. 야율초재 같은 약해빠진 유생이 전쟁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아무짝에 쓸모없는 사람을 대 칸께서는 너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야율초재가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응수했다.
“활을 잘 쏘려면 먼저 기술자가 훌륭하게 활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마치 천하를 얻는데 활 만드는 기술자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는 말 같군요. 더군다나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 말에 힘만 쓸 줄 알았지 무식하기만 한 다른 장군들마저 야율초재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칭기즈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후계자로 지목한 셋째아들 오고타이에게 이렇게 부탁했을 정도였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너 역시 앞으로 나랏일과 군사작전에 대한 것은 모두 그와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해라.”
힘의 패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의 문신(文臣)의 역할
몽골군이 1219년부터 6년간 호라즘 제국과(중앙아시에 있던 이슬람 제국) 서하 등 서방 원정에 나서게 되었을 때 야율초재 역시 종군하게 되었다. 그런데 6월의 한 여름인데도 눈이 무려 석자나 쌓일 정도로 내렸다. 미신을 중요시 여기는 몽골사람들이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며 술렁일 때 야율초재가 말했다.
“겨울의 살기(殺氣)가 여름에 보인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우리가 받들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좋은 징조입니다.”
사실 그 말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 천문에 무지한 몽골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야율초재가 즉석에서 꾸며낸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몽골사람들은 야율초재의 그 말에 용기백배하여 호라즘과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는, 결과가 야율초재의 점괘와 다르지 않았다며 그를 더욱 높이 숭상하게 되었다.
그런 경우는 그 다음에도 또 일어났다.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나자 넷째 아들인 톨레이(예종)가 당분간 국정을 대리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유언은 황제 자리를 셋째 아들 오고타이에게 물려주라는 것이었다. 최고 통치자가 갑자기 죽고 난 후, 후계자의 문제는 너무도 민감한 문제였다.
황제 자리가 허수아비 같은 인물로 채워지거나 잘못 전해지면 나라와 백성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야율초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야율초재는 오고타이를 재촉하여 몽골 최고부족회의인 ‘쿠릴타이’를 되도록 빨리 열게 했다. 거기서 칸을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회의를 연지 40일이 넘도록 결말을 보지 못했다. 자칫하다가는 칭기즈칸의 아들들 간에 전쟁이 일어날 기미까지 보였다. 할 수 없이 야율초재는 톨레이를 찾아가 천문과 점복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이번 기일이 지나면 더 이상 길일은 없다’며 엄포를 놓았다. 이때 역시 몽골귀족들이 믿는 미신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톨레이가 양보를 하고 오고타이의 등극 날짜가 정해질 수 있었다.
이어서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의 형인 차가타이에게 찾아가 가족으로는 형이지만 군신관계에서는 신하인 만큼 동생의 즉위식에서 무릎을 꿇고 엄정한 예의를 갖추어 줄 것을 요구했다. 차가타이가 그렇게 해준다면 오고타이의 즉위는 더 이상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차가타이 역시 야율초재의 요청을 받아들이자 즉위식은 순조롭게 끝날 수 있었다. 그때 차가타이가 야율초재를 칭찬하며 한마디했다.
“당신이야말로 우리 몽골의 사직을 지키는 일등공신입니다.”
후계구도가 확실해지자 몽골군은 본격적으로 중원정벌에 나서게 되었고, 일단 남송과 연합하여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금나라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몽골의 정예병과 남송의 군대가 함께 공격을 했어도 그들은 3년이나 버텨냈다. 쌍방의 사상자가 백만에 육박할 정도로 처절한 전투였다.
그러나 1234년 수도 변경이 함락되고 기어이 금나라가 멸망하자 몽골의 장군인 속불대가 끝까지 저항한 금나라의 도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사람들을 모두 도살하자고 건의했다. 칭기즈칸 이래 몽골군은 정복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리 항복한 성들은 살려주지만 끝까지 저항한 모든 도시는 철저히 파괴해왔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야율초재는 급히 태종인 오고타이의 막사로 달려가 말했다.
“우리 군사들이 이 땅을 얻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리며 전쟁을 치른 목적이 무엇입니까. 토지와 백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백성을 모두 죽여 버리면 이 땅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더구나 변경은 한 나라의 수도입니다. 진기한 문물과 솜씨 좋은 기술자들이 이곳에 다 모여 있습니다. 만약 도시를 파괴하고 그들을 다 죽여 버리면 칸께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마침내 황제의 마음이 움직였다. 오고타이는 성에 진입하여 금나라의 황족만을 잡아 죽일 뿐, 백성과 물건엔 절대 손대지 못하게 했다. 결국 도성의 귀한 문물과 140만이라는 변경 백성들이 야율초재의 노력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후부터도 점령지에서 관례대로 해오던 파괴행위와 대살육의 풍조가 몽골군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야율초재의 개혁정책
초원의 유목민족인 몽골 사람들은 씨족사회에서 살아왔기에 국가라는 개념이 아직도 미약했다. 그들은 군사와 무기에 의존해서 영역을 넓히고 엄청난 땅을 정복했지만 문명이라고 말할 만한 수준조차 되지 못했다.
중원을 정벌하고 나자 몽골귀족인 '별질'이라는 자는 ‘중원지구의 한인(漢人)들은 목축을 몰라 우리에게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전부 죽이고 중원 땅을 초원으로 만들어버리는 편이 낫습니다’라고 주장하여 야율초재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문명수준이 높은 중원과 여타 정복지를 다스리려면 당장 법체계와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다행이도 비교적 깨어있는 의식을 지녔던 오고타이 황제는 야율초재의 말에 따라 ‘한족의 법’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한화(漢化)식 개혁'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렇게 야율초재는 몽골국가의 정치와 경제정책, 그리고 법률을 새롭게 제정했다. 당시 야율초재가 제안한 정책과 제도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약탈이나 도살 같은 좋지 못한 습속을 없애 백성과 포로의 목숨을 구했다. 이로써 중국인의 몽고에 대한 두려움과 복수심을 많이 해소시켰다.
둘째, 칭기즈칸 이래 정복지를 나누어 분봉제를 시행해오던 저급한 통치방식을 막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바꾸어 체제를 강화하고 전국에 중앙의 통치방식이 골고루 미치도록 했다.
셋째, 유교를 존중하고 교화를 제창했다. 처음부터 야율초재는 중국의 사상들 중 유가를 압권으로 쳤고, 통치자들에게도 그것을 세뇌시켰다. 이로써 많은 유생들이 벼슬에 나서게 되었고 몽고의 관료문화가 크게 바뀌어 문무가 조화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넷째,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여 폭정을 막았다. 관습만이 있을 뿐 법률이 무언지도 모르는 몽골인들을 법으로 다스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엄청난 크기의 제국을 다스리기엔 법치밖에 없음을 사람들에게 설득했다. 결국 법치는 관리의 탐욕과 폭정을 억제했으며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다섯째, 농업을 발전시켰다.
여섯째, 조세제도를 수립하여 군사적 약탈을 대신했고 관료들과 군사들의 녹봉제를 시행했다. 사실 몽골족은 그 때까지 녹봉은 물론 세금이란 개념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약탈을 해서 하급무사까지 모두 함께 나누어 가졌다. 그것으로 그들의 전쟁 비용을 포함한 여타 비용으로도 충당했다. 당연히 필요한 물자와 비용을 조달시키는 체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야율초재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황제까지 처음엔 조세제도의 이점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필요하다면 그냥 가서 빼앗아 오면 될 것을, 뭐 하러 그런 골치 아픈 제도를 만드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1231년 처음으로 하북 일대에 시험 적으로 조세제도를 시행했을 때 거두어진 금, 은, 옷감, 농산물 등 현물세를 포함한 세금이 산더미처럼 궁중에 쌓이자 황제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때 오고타이황제가 하도 신기한 나머지 야율초재에게 말했다.
“그대가 내 곁을 떠나지 않고도 나라에 필요한 물자를 이토록 많이 거두어들이다니, 누가 감히 그대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일곱째, 고리대금을 억제하고 지나친 착취를 금지시켰다. 당시 나라가 넓어지니 잔꾀에 밝은 상인들에 의해 고리대금이 성업이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은 늘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 심각한 착취현상으로 발전했다. 이에 야율초재는 고리대금의 이자율을 제한하고 많은 빚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관에서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 또 상인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는 관리들을 숙청했다.
이렇듯 야율초재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몽골 통치자들은 중원의 발전된 제도에 빠르게 적응해나갔고, 도처에 널려있는 파괴와 백성들의 상처를 회복시켜 나갔다. 이렇게 몽골의 봉건경제는 정상적인 발전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동방에 빛나던 별이 떨어지다
야율초재는 치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익을 주는 일 한 가지를 더 하는 것이 해를 주는 일 하나를 제거하는 것보다 낫다. 한 가지 일을 더 만들어내는 것이 나쁜 일 한 가지를 줄이는 것보다 낫다.”
참으로 진취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국가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면 어떤 방법이라도 생각해내고 최선을 다해 실행했다. 그의 생각은 황제에 의해 대부분 접수되었고, 때로는 황제 본인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따라서 지배층은 그가 어떤 의견을 낼 때마다 조바심을 내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기득권을 누리다가 각종 제한을 받게 된 수구세력들의 저항이 극렬했다. 그러나 야율초재를 태산같이 믿고 있는 황제는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한번은 야율초재에 대한 유언비어를 악의적으로 퍼트리는 연경의 유후(연경 시장)를 황제가 잡아들여 야율초재에게 직접 심문하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야율초재는 ‘개인적인 원한보다는 나랏일이 더 중요하다’며 나중에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황제와 대신들은 그토록 관대하고 사심 없는 야율초재의 인품에 다시 한 번 감탄했고, 이후로 그에 대한 유언비어가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고타이가 등극한지 13년째인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고 그의 여섯째 황후인 내마진후(乃馬眞后)가 정권을 잡자 다시 수구세력이 고개를 들어 야율초재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정은 삽시간에 기강이 문란해지고 간신들이 설쳐댔다. 야율초재가 그토록 반대했음에도 국가의 조세권까지 거상에게 많은 돈을 받고 팔아버렸을 정도였다.
내마진후 또한 너무 꼬장꼬장한 그에게서 마음이 돌아선 것을 안 야율초재는 30년 가까이 애 썼던 몽골조정을 뒤로한 채 병석에 누웠고, 곧바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1243년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