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언어를 찾아 나선 여행
그동안 사람들은 세상 진리를 수도 없이 나열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자연의 진리라는 건 딱 하나밖에 없다는 걸 인류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존재와 소멸의 반복일 뿐이다.’
언어도 마찬가집니다. 기존의 언어는 사라지고, 또 다른 언어가 세상에 나와 활보합니다.
아무도 사용치 않던 언어로 색채를 입히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언어의 새롭고도 간결한 비밀을 파헤쳐 시를 짓는 문인이 있습니다. 이들의 욕망은 한결같아서, 뭔가 새로운 언어를 찾아 세상을 방황합니다.
당나라 시인 송지문은 어느 날, 제자이자 사위인 유희이가 전 날 썼다며 봐 달라는 시를 읽게 됩니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세월이 가도 꽃은 그 모습인데
세월이 갈수록 사람은 달라지네.
사위의 시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그 기막힌 언어적 연금술에 송지문은 무릎을 치고 나서 젊은 사위에게 은근히 사정합니다. 이 시를 내 이름으로 발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남루한 영혼으로 어렵게 길어 올린 언어의 단 샘을 빼앗길 수 없어 사위는 거절했고, 송지문은 끝내 스물여덟 젊은 사위를 죽이면서까지 그 보배로운 시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합니다. 그러나 역사 앞에 그 진실은 밝혀져서 오늘날 이 시의 저자는 유희이로 다시 고쳐졌습니다.
바로크의 거장인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는 당시 화단의 새로운 언어랄 수 있는 빛을 그림으로 끌어들여 젊을 때부터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네덜란드 화가인 고흐는 각고의 노력 끝에 그림의 독특한 언어를 발견했어도 그걸 알아 볼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나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사람의 소통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어서 새로운 언어란 불가항력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천재문인이라는 칭송을 받는 이상은 원래 화가의 길을 꿈꾸었을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아주 독특한 성격인 그는 김해경이라는 본명을 가졌음에도 친구에게 오얏나무 미술도구함을 선물 받아 흡족한 나머지 이름까지도 오얏나무 상자라는 의미인 이상(李箱)으로 개명해버린 사람입니다.
매사에 자살을 꿈꾸었을 정도로 늘 죽음의 세계와 노닐었던 그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30편의 연작시를 쓰겠노라 공표한 다음 매일 한 편씩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상이 사용하는 듣도 보도 못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던 그들은 이런 정신병자의 글을 시라고 하느냐면서 신문사에 항의했고, 이상은 열다섯 편을 끝으로 연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작품은 27년 밖에 살지 못한 이상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감도(烏瞰圖)연작시입니다. 그 중 열셋째 날 발표한 시는 이렇습니다.
[시 제 13호]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촉대세움으로 내 방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얄따란 예의를 화초분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숫자의 나열이나 의사의 처방전 등 온갖 새로운 언어를 동원한 이 연작시들은 제목부터가 새로운 언어였습니다. 건축가였던 이상은 새가 내려다본다는 의미의 건축 조감도(鳥瞰圖)에서 첫 글자인 새 조자의 한 획을 뺀 까마귀 오자로 제목을 지었는데, 이건 세상에서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말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사용할 일이 없는 언어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언어작법에 심취했던 이상은 자신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독자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합니다. 마지막 시가 될 열다섯 번째 발표 날 따로 작가의 말을 이렇게 첨부했던 겁니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 십 년씩 떨어지고도(우리 문학이 외국에 비해 상당히 뒤처졌다는 말)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아니 하느냐.(공부들 좀 하라는 질타) 여남은 개쯤 써 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이천 점에서 삼십 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용대가리를 딱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 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용대가리를 뱀꼬랑지 취급도 하지 않는 독자들 때문에 30편 모두 발표할 수 없게 되어 서운하다는 말)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 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 준 데는 절한다. 이것은 내 새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굴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메아리)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 물론 다시는 무슨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고 위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딴은 정신병이나 고치겠다.’
이건 거의 새로운 언어를 변별치 못하는 독자를 향한 작가의 호통에 다름 아닙니다. 그만큼 이상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열망과 확신을 버리지 않으려는 기개 넘치는 작가였습니다.
끔찍이도 편을 들어주었다는 이태준과 박태원은 친구면서 역시 천재문인들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습작문인들의 대표적인 교과서인 ‘문장강화’를 쓴 사람이 이태준이고,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로 유명한 ‘방란장 주인’을 쓴, 당대의 실험적인 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겐 애석하게도 이상의 새로운 언어를 가슴으로 해독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새로운 언어사용은 고단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이상의 작품은 훗날 수많은 문인들에게 폭포수 같은 영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심연에 가려진 영혼을 흔들어 깨울 언어의 이상향을 오히려 피안의 세계에서 찾기란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막대한 언어세례의 환영을 볼 때 고대의 한 소경 이야기꾼이 떠오르게 됩니다.
사실 호메로스에게 인류의 희망을 건다는 건 그의 처지와 환경을 볼 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B.C 1200년 경 미케네 문명이 사라지고 약 600년간의 그리스 암흑기 중후반 어디쯤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죽고 난 이후로도 100여년이 지나야 아테네의 입법자 솔론이 나오면서 그리스는 인류역사에 문명국으로 재등장하게 됩니다. 그 어두운 시대에 살았던 호메로스는 더구나 앞 못 보는 떠돌이 걸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앞으로 수천 년 간 인류에게 언어를 통해 영혼 깊숙이 씻어낼 샘물을 공급해주리라는 건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경에도 불구하고 영감이 풍부한 배우였으며,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마을의 널찍한 마당에서 자신이 읊조리는 서사시와 거기에 장단을 맞추는 하프 소리 들어줄 청중을 향해 이상적인 각도로 앉을 줄 아는 연출력도 발휘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감동적인 설득력이었습니다. 청중은 그에게서 힘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찾게 됩니다. 그동안 믿지 못하던 진리에 휩싸인 존재의 상(像)들을 사람들은 그를 통해 비로소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나간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궁극적인 질문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실 호메로스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당시 지중해 연안에 살던 사람들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트로이 전쟁 이야기와 거기에 따른 목마사건을 대개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호메로스가 특별했던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자기만의 언어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의 언어에 따르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승리한 아킬레우스보다 패한 헥토르에게서 더 많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란 승리와 패배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빛나게 될 기름진 마음 속 토양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서양문명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의 진정한 문명이 잉태됩니다. 그리스 황금기의 3대 비극 작가 중 하나로 추앙받는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비극 작품들이 ‘호메로스 잔칫상 위에 놓인 빵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호메로스는 가히 새로운 언어라는 도구로 어두운 창문에 빛을 쏟아 부어 그리스를 깨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의 빛은 오늘 날 세계를 비추고 있습니다.
강렬한 언어의 빛은 죽음도 막을 수 있습니다.
조조의 맏아들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대신들은 권좌의 안전을 위해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던 아우 조식을 죽여야한다고 간합니다. 평소 형제애가 깊었던 조비는 번민하지만 결국 조식은 잡혀와 황제 앞에 무릎 꿇습니다. 아버지 조조만큼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었던 조식이 눈물로 간청합니다.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읊어 형님을 설득하지 못하면 날 죽이라고. 이 때 대신들은 그 시에 ‘형제’라는 말을 뺀 전혀 새로운 언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을 겁니다. 싸늘한 권력의 칼날 앞에서 그 유명한 칠보시(七步詩)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황제의 윤허로 일어난 조식은 그 아까운 세 걸음을 눈물에 싸인 침묵으로 천천히 걷습니다. 그러고는 네 걸음 째부터 조식은 황제를 바라보며 한 걸음에 한 연씩 오언절구를 읊습니다.
萁向釜下然 기향부하연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上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콩깍지 태워 콩을 볶으니
솥 안에 콩이 흐느끼네
콩과 깎지는 본시 한 뿌리에서 났거늘
어찌 서로 들볶아야 하는가
이 순간, 황제인 조비뿐만 아니라 조식을 죽이려 했던 대신들까지도 눈물을 흘립니다.
세상 언어가 살아 숨 쉴 때마다 언어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조바심을 갖습니다. 세상 이치와 그 내면을 확고한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이 좁아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것은 소멸합니다. 모두의 의식 속에 뿌리박힌 그 불안은 어쩌면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대할 수 있는 건 그 소멸의 과정 중에 새로운 탄생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진정한 진리가 거기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세계의 아름다운 치장을 위해 예술적 언어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그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