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폐해에 대하여
열 네살 가을이었을 것이다.
이 기억에 빈틈없는 확신을 갖는 것은, 그 날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텅 빈 시골길 양 옆으로 늘어선 코스모스 하늘거렸던 기억까지, 오랜 세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난히 나른했던 일요일 오후,
뒤뜰에서 담을 고치던 아버지가 무료했던지, 큰 배터리를 등에 지고 있는 라디오를 가져가 틀어놨는데, 라디오는 눈치도 없이 아버지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유행가 일색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당시 장소팔 고춘자의 광팬이었으므로, 라디오에서 만담이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뉴스라도 듣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껐을 때, 얼른 나가 슬며시 그것을 내 방으로 가져왔다.
라디오에서 여러 노래가 앞마당 펄럭이는 무명 빨래처럼 의미 없이 흘러갈 때만 해도 나는 여전히 코 박고 있는 밀린 숙제에서 놓여나지 않았다.
그런데 박인희 노래가 나올 때였다.
자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상한 향기가 늘 가슴을 옥죄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친구 누나 음성처럼, 메아리 깊은 그 느낌에 울컥 멀미가 났다.
자연의 이치와 법도는 엄정해서, 당시 나 또한 다른 또래들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오는 정신적 올가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후에 사람들이 그 올가미를 일컬어 사춘기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목적도 계획도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동리를 벗어났다.
그 왜 있잖은가. 혼자이고 싶은 그 곳.
어째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 정작 본인은 알지도 못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슴 속 올가미를 안고 사는 또래들은, 그 가슴 속 방망이질 또한 이해할 수 없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설프거나 조잡하게 포장하는 것을 유치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치(幼稚)함의 진정한 의미는 두 글자 모두 어릴 유, 어릴 치자로서 전혀 포장되지 않은 '순수한 본능'이라는 의미다.
그 또래들은 늘 연어처럼 본능의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땐 어렸던 우리처럼 자연도 젊었다.
각설하고.
우리는 점점 나이를 먹어 간다.
사실 늙는다는 것은 그리 안타깝지 않다.
뭐 순리니까.
문제는 자연과 환경마저 늙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건 순리가 아니다.
더욱이
문명의 진보 속도가 너무 빨라졌다.
문명은 태동하고부터 수천 년간 느릿느릿 진보했다.
급격했다던 초기산업혁명도 200년이나 이어졌다. 기계기술 문명도 100년은 갔고, 데스크 탑 시대도 40년은 이어졌다.
그것은 적어도 삶의 환경이 한 세대 정도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걸 의미한다.
그러나 10여년 전 3G 스마트폰이 나오고 부터 삶의 방식은 급격하게 진보한다.
작년, 그러니까 2021년에 나온 5G 기술은 이제 무선 인터넷이 유선 인터넷 속도를 추월했고,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많은 환경의 변화를 예고했다.
우리 같은 세대에겐 '메타버스'라는 폭발적인 개념을 이해하기에도 머리가 폭발할 것 같다.
인텔의 공동 창립자이자 CEO였던 고든 무어는 1965년 그 유명한 '무어의 법칙'을 발표했다.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은 2년마다 두 배씩 발전한다는 이야기다.
신통하게도 그것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런데 최근엔 엔비디아의 설립자이자 CEO인 젠슨 황이 새롭고도 무시무시한 법칙을 발표했다.
'AI를 구동하는 반도체 성능은 2년마다 두 배 이상 향상된다'는 게 그 법칙의 요지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기술이 가공할 속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우리 인간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부와 기술, 그리고 인간 삶의 패턴에 많은 변화를 예고한다.
언젠가 바닷가 앞 호텔에서 잠을 깬 적이 있다.
파도소리 내내 영혼을 침잠했던 밤을 보내고 맞이한 아침이었다.
테라스로 나가 바다를 쳐다보니 다소 언짢은 기색으로 파도가 다가왔다.
지난 밤 내 안에 포근한 홀로그램을 씌워주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날 오후 태풍에 밀려 해변 마을 앞마당까지 파도가 밀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자연은 아름다운가. 포학(暴虐)한가.
지난 밤 자연은 내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 날 내게 자연은 포학하지 않았다.
윤리와 소통, 그리고 희망의 보편성에 대해 잔소리를 떠들어대는 철학자들이 묻는 인간 삶의 척도란 따지고 보면 단순하며 그 핵심은 이렇다.
우리는 행복한가!
“인간의 행복은 자연의 삶을 살 때 주어지며 인위적 삶은 불행의 척도”라는 말은 장자사상의 요체다.
수차(水車)를 돌려 논에 물을 대는 농부를 보며 장자는 탄식했다.
“기계의 편리함에 의지하는 인간의 말로를 왜 너희들은 보지 못하는가.”
이건 장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신이 온전한 철학자라면 문명의 고도화 속에 사는 인간보다 사유재산과 인위적 결혼제도, 그리고 깊은 사유(思惟)마저 있을 것 같지 않던 3만 년 전의 인류가 더 행복했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문명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발명, 또는 진보되는 것임으로 중독성이 강하다.
그리고 뭐든 ‘중독’이라는 의미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부처는 제자들에게 문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
부처의 제자들은 무려 50년 가까이 스승의 강의내용을 절대 필기할 수 없어 무조건 외워야 했다.
부처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겨우 문자화 된 것은 부처가 죽은 이후의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 문명을 거부하라고 말할 스승들이 없기에 문명이 주는 혜택을 거부할 사람 또한 없다.
오늘 날 우리는 혹시라도 전화기를 집에 놓고 외출하면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나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기계 종속적 삶은 가속화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기술들로 말이다.
1.증강현실 세계 (增强現實,augmented reality 디바이스를 사용해 현실에선 상상으로만 여기던 판타지적 요소나 편의성을 지닌 가상의 정보를 실존하는 형상에 덧 입혀 환상적인 현실을 구현하는 기술.)
2.라이프로깅 세계 (Lifelogging, 모든 사람의 일상적인 경험과 정보를 캡처하고 저장하고 묘사하여 데이터화 하는 기술.)
3.거울 세계 (Mirror Worlds, 현실세계의 풍경, 모습, 정보, 구성 등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반영한 가상세계를 뜻하며, 실제의 지구와 같은 가상의 디지틀 세상을 구현하는 기술.)
4.가상 세계 (Virtual World, 현실과 유사하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대안적 세계를 디지털 데이터로 구축하는 기술.)
이런 메타버스 기술들이 완벽하게 구현 될 세상은 채 10년도 남지 않았다.
자연은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인간에게 꿈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명은 진보할수록 몇 몇 사람에게 부를 안기는 대신 대다수 인간의 행복을 앗아갔다.
가까운 미래, 몇 몇의 특출한 기술은 더욱 큰 자본을 소수에게 몰아주고 나머지 대다수 인류의 자유마저 박탈할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