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능력으로도 뜻을 고집하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흑인이 정치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습니다!"
- 1858년 7월, 링컨이 대통령 출마를 공식 발표할 때의 연설문 중에서-
링컨에 대한 잘못된 시각
미국인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링컨의 이야기가 많은 부분 각색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노예 문제에 대한 링컨의 태도는 거의 잘못 알려져 있다. 그가 '미국 분열을 막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는 있어도 '위대한 노예 해방자'라는 찬사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알려진 바와 달리 그의 대통령 수행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준비되지 못한 대통령'이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실제로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던 당시, 무능과 지혜의 결여로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반대파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그의 재임 기간에 남북전쟁의 종결과 노예해방이라는 적절한 타이밍이 없었다면, 그는 영원히 무능한 대통령으로 남을 뻔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정직했고, 자신의 실수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가 고집 세게 미국 연방을 수호하기 위해 애쓸 땐 추종자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결국엔 통일된 미국을 지켜냈다.
링컨의 탄생
유럽의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해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 1809년 2월 12일.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에이브러햄(Abraham)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기 이름자도 쓰지 못하는 일자무식인 그의 아버지도 그 옛날 구약성경의 인물인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좋아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가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 Thomas'의 이름을 자기에게 붙여주었던 데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도마 정도의 이름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 속의 더 위대한 인물을 찾았을 수도 있다.
자세한 동기야 어쨌든, 유대인의 시조이자 기독교도와 모슬렘이 떠받드는 아브라함이라는 성경 인물을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으니, 토머스 링컨도 자기 아들이 그토록 위대한 인물의 이름으로 불리다 보면, 최소한 시골 마을에서라도 존경 비슷한 것을 좀 받으며 살지 않겠나, 하는 소박한 마음이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경의 그 인물 또한, 한때 젊고 아리따운 자기 아내를 빼앗으려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죽임을 당할까 겁이 난 나머지 "이 여자는 제 동생입니다"라며 약삭빠른 거짓말을 할 정도로 이름값을 못하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후세 사람들의 "믿음의 아버지"라는 칭송에 걸맞지 않게 나이 70이 넘어 하느님이 직접 나타나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고 했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연하인 그의 아내도 이미 폐경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가 100살, 그의 아내가 90세 때 실제로 아들이 생기는 기적이 일어나자 그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굳건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이름의 시원인 아브라함처럼 링컨 또한 일생 대부분이 고단한 삶이었다.
불우했던 청년 시절
일리노이 주의 자기 마을 앞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에서 뗏목으로 목재 나르는 일을 하던 청년 링컨은 조금 수입이 짭짤하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 당장 측량 기사를 쫓아다니다가 곧바로 측량사가 된다.
어떻게든 농사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링컨에겐 사람들을 잘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또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그나마 글을 읽을 줄 알았기에 순회 판사가 마을에 와서 재판을 열 때엔 사람들의 부탁으로 잔돈푼을 받으며 변호 일도 조금 해 주었다.
무식하긴 하지만 언변에 조리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얼마 후 순회 판사가 그를 마을의 정식 변호사로 임명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 못할 일이지만 당시의 미국 개척지엔 모든 행정과 제도가 '엉망'이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그는 나중에 일리노이주의 수도인 멤피스로 가서 법률 시험에 턱걸이로 합격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정식으로 개업하긴 한다. 그랬어도 법률 지식이 일천했기에 그는 동부에서 대학을 나온 젊은 변호사와 평생 동업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링컨이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주 수도인 멤피스까지 진출하여 번듯한 변호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고향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꿈에 젖게 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극성에 힘입어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후보가 되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어 내리 네 번을 연임하고는 용기백배하여 연방 하원까지 진출하여 당선된다.
더 큰 시련의 연속
하지만 그의 좋은 시절은 이것으로 끝이 난다. 지방 의원과는 달리 연방 의원으로서의 성적이 지지부진했던지 그다음부터는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그리고 부통령 등 모든 선거에서 번번이 낙선하고 찾아온 기회마다 상실한다.
제 아무리 천성이 낙천적인 링컨이었다지만 이즈음 그는 신경쇠약에 걸려 고생하는 와중에 선거로 아까운 돈을 탕진했다는 이유로 아내의 잔소리를 끝없이 들어야 했다. 실제로 그는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이 되고서야 빚을 내서 양복 정장을 생애 처음으로 사 입었을 정도로 가난뱅이였다. 순회 판사를 따라다니며 변호사로서 부지런히 일했어도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링컨은 바짓단이 정강이 어디쯤에 걸쳐 있을 정도로 키가 컸지만(193cm였다.) 지독하게 못생기고 말라깽이인 데다가 세련되지 못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누가 봐도 허풍선이나 아니면 시골 촌놈으로 보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장작 패는 놈(Railsplitter)'이라는 별명으로 부를 정도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링컨의 초상화는 그나마 중후한 남자로 그려졌지만 당시의 각색되지 않은 실제 사진들을 보면 서양의 미적 기준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추남이다.
처음부터 노예 해방론자로 알려진 링컨이지만 실제 그가 완전한 노예 해방을 단호하게 부르짖은 것은 그가 죽기 바로 전, 그러니까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승리가 눈에 보이던 시점이었다.
그전까지 그는 대다수의 여론에 따라 남부의 기존 노예 허용 주(州)는 그냥 놔두고 북부와 서부의 새로 개척하는 신생 주들에서만 노예를 금지하자는 어정쩡한 '회색분자'였다. 더구나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반대했다. 흑인을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그런대로 찬성하지만 그들이 결코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링컨의 시각을 분명히 나타내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노심초사 정치행로를 모색하던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오는데, 소속당인 공화당에서 일리노이주의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추대된 것이다. 그런데 상대인 민주당의 현직 상원의원이자 전국적으로 명망 있는 인물인 스티븐 더글러스가 자기의 정견과 비슷하자 링컨은 그와의 차별성을 노리고 약간 진전된 견해를 내놓는다.
그것은 노예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연방법으로 아예 정해놓자는 것인데, 마침 상대인 더글러스는 링컨에 반대하여 노예 법은 각자의 주에 맡기자고 부르짖는다. 이때 링컨은 약삭빠르게도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미국의 정치사상 최초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행해지는 공개토론을 요구한 것이다.
비록 받은 교육은 부실했지만 대중을 사로잡는 화술을 자랑하던 링컨으로서 그것은 인생 최대의 승부수였다. 반면 노련한 정치가인 더글러스의 눈엔 그저 애송이로밖에 안 보이는 링컨의 철없는 제안이었다. 그때 스티븐 더글러스가 주위에 말했다고 한다.
"저 자가 멤피스의 변호사 자리마저 진저리가 나는 모양이군."
곧바로 더글러스는 쾌히 승낙했고 그 일은 전국적으로 호기심을 유발한다. 스티븐 더글러스는 이 자리에서 링컨의 정견이 자주 바뀌는 것을 꼬집으며, '링컨 씨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자 링컨이 이렇게 응수했다.
"제가 두 얼굴을 가졌다면, 지금 이 자리에 하필 이 얼굴로 나왔겠습니까?"
결국 일리노이주의 도시들을 옮겨가며 일곱 번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일리노이 밖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링컨은, 언론에 의해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선거에서 또다시 참패한다.
그러나 이제 앞을 향해 질주하는 그의 앞을 가릴 것은 없었다. 마치 그와 이름이 같은 성경의 인물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인생의 후반인 이때쯤에 국가를 위한 소명의식을 강하게 느낀 것 같다. 다만 그의 소명의식이 알려진 대로 노예문제가 아닌 국가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어눌한 일리노이 사투리지만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은 굽히지 않는 그의 말투엔 힘이 있었고 차츰 당 내의 시선이 그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음 대통령 자리를 자연스레 바라보게 되긴 했지만 그에겐 갈 길이 멀었다. 아직 상대인 민주당은 고사하고 같은 당의 유력 인사들에 비해서도 전국적인 지지도가 형편없이 부족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시골 마을 가난한 개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좌충우돌 삶의 여정을 힘겹게 이끌어 온 링컨에겐 정치라는 것이 처음부터 무모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약아빠진 인간이었다면 이런 힘든 여정은 애초에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바라보는 눈은 아버지 토머스에게서 이어받은 그대로 우직했다.
"삶이란 무언가에 대한 책임이다."
더구나 그는 그 '책임'을 위해 많은 인생의 대가를 치르고 여기까지 왔으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열린 당내의 다음 대통령 지명전에 뛰어든다.
그 해의 지명전은 전례 없이 치열해서 과반수를 넘는 후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각 후보 간의 합종연횡 끝에 결국 3차 투표까지 가서야 겨우 결론이 났는데, 근소한 차이로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때마침 전국의 이슈가 되어버린 노예 문제로 상대인 민주당이 분열하여 후보가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공화당 단일 후보인 링컨의 낙승은 누구도 점치질 못했다. 대통령 후보들의 개인적인 정치 경력을 따져보면 모두가 연방의회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지만 링컨만은 지방 의회 몇 번에 연방 상원도 아닌 하원의원을 한번 지낸 것 외엔 이렇다 할 경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어도 그는 1860년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때 링컨은 40%도 채 안 되는 미미한 지지율이었다. 정말이지 극적인 당선이었다.
당선의 기쁨도 잠시. 전국적으로 내로라하는 워싱턴의 정객들 사이에서 중앙 정치 경력이 거의 없는 데다가 특별한 추종자도 별로 없는 신임 대통령 링컨의 시련은 장관 인선에서부터 불거져 나왔다. 장관을 맡아 주십사 하는 링컨의 정중한 제의를 대부분 인사들이 쉽게 수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40%도 안 되는 지지율로 당선된 권위 없는 신임 대통령의 각료를 지냈다가 경력에 오점을 남길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각료의 인선이 마무리되었을 때는 사상과 정견, 소속 당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탕이 뒤섞인 내각이 되어, 한번 회의를 좀 하려면 아수라장이 될 정도였다.
거기에 새로 입주한 백악관의 낡은 가구며 집기들을 버리고 뉴욕의 번듯한 가게에서 닥치는 대로 외상 쇼핑을 해대는 철딱서니 없는 그의 아내 메리마저도 링컨의 권위를 깎아내리는데 한몫 단단히 한다.
가진 재산이 거의 없는 대통령으로서는 수만 달러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외상값을 갚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나가 무례하게 삿대질까지 해대며 아우성치는 의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돈을 국고에서 타 내는 방법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남북전쟁의 발발
그뿐만이 아니라 남부의 여러 주들이 연합하여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일촉즉발의 내전 위기가 닥쳤을 때에 링컨은 백악관 생활에 대한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대책 없는 영부인을 달래며 커튼을 새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끝내 전쟁이 터졌지만 링컨은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소수의 남부 세력을 제압하는 데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낙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또 여러 주로 이루어진 경계 주(눈치를 보다가 힘이 강한 쪽에 붙으려는 주)들도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링컨의 오판이었다. 남부연맹이 서전에서 연전연승을 할 때, 대통령인 링컨은 북군의 장군들마저 통솔하지 못해 진땀을 뺀다. 사사건건 대통령의 전략에 반대하는 북군의 총사령관인 조지 매클렐런 장군을 할 수 없이 해임했지만, 다른 장군들과의 관계 또한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여러 핑계로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통령이 반대하는 짓만 골라서 행동한다. 급기야 링컨은 전쟁터를 일일이 찾아가 장군들을 격려하며(사실은 살살 달래서) 어렵게 전쟁을 이끌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북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급조된 남부연맹의 군수품 조달 능력이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4년을 허비한 북군은 그제야 명장을 알아본 링컨에 의해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겨우 반격을 하게 되고, 남군을 수세로 몰아넣게 된다.
그러는 동안 링컨은 연방의회마저 장악하지 못한다. 자기 지역구들의 당면한 문제와 각 정파 간의 대립으로 온통 혼란에 빠진 의회를 링컨은 글자 그대로 거의 방치해버린다. 링컨의 재주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벌써 임기가 끝나가고 차기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 즈음 링컨에게는 고맙게도 그랜트 장군이 승리의 소식을 매일 보내온다. 이때, 남부에서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어이없게도 남군 사령관인 로버트 리 장군이 자기 정부에 노예해방을 주문한 것이다.
"남군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우리는 흑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입대시킬 방법밖에는 없다."
이게 노예해방을 해야 한다는 그의 요지였다.
남부도 북부와 함께 스토우 부인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이 발간된 1852년 이후로 노예해방에 대한 각성이 일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영국이 1833년, 프랑스가 1848년 노예해방을 할 때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던 미국인들이 한 권의 소설로 각성했다는 것도 이채롭긴 하다.
이에 북군의 장군들이 링컨에게 매달린다.
"각하, 우리가 선수를 빼앗긴다면 명분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먼저 노예해방 선언을 해야 합니다."
정치인이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하다. 링컨도 정치가였다. 지금까지 노예해방에 대해 지극히 미온적인 태도였던 링컨은 자신의 정견을 다시 한번 재빨리 바꾼다. 기존의 노예 법을 가진 남부의 주까지도 포함한 미국의 모든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열성적으로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마저 처음부터 우려했던 400만의 흑인들이 갑자기 해방되었을 때의 사회적, 경제적 혼란은 이제 그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누가 봐도 그에게 당면한 과업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한번의 승리뿐이었다.
대통령 재선과 남북전쟁의 종결, 그러나 혼란은 지속되고
일평생 거의 교회를 나가지 않아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지 의심스러운 링컨이었지만, 노예의 부당함을 역설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정직한 믿음을 가지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전면적이고도 완전한 노예해방을 부르짖자, 뜻하지 않게 미국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외국의 언론에서까지 찬사를 받게 되면서 링컨은 재선에 성공한다.
오래지 않아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종결되고 링컨은 전국적인 정치적 영웅으로 떠오르지만, 당장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에 대한 처우에 당면하고는 허둥댄다. 이때 그의 고질적인 무능력의 병이 또다시 고개를 쳐든다.
링컨은 도대체 묘안이 떠오르지 않자 해방노예들을 모조리 아프리카로 집단 이주시키면 된다는 주장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그의 눈엔 아직도 흑인들은 백인과 동등한 사회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기가 막힌 의회는 다른 것은 어쨌거나 "그 엄청난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려느냐"며 당연히 반대했고, 말도 되지 않는다 하여 흑인 지도자들마저 반발했을 정도였다.
이도 저도 안 되자 전후 복구 과정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남부의 주들에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대농장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그들의 노예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급진파들의 꼬드김에 동조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그는 이토록 중요한 사안 앞에서 자주 중심을 잃는 지도자였다.
그래도 그는 미국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여러 실수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미래를 그리는 그의 큰 틀은 변함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국가의 분열을 용납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의 깃발을 드높여야 한다는 국부(國父)들의 이상에서 궤도이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그는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실상 무능했던 그가 재임 기간을 채웠더라면 역사의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국내외의 모든 언론이 아직은 노예 해방자로서의 영웅적인 모습으로 미국 대통령을 그리고 있던 때에 링컨은 암살자의 손에 저격당한다. 그리고 이튿날인 1865년 4월 14일 영면한다.
그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을 상기했다. 매사에 그토록 우둔하고 세련되지 못해 보였던 그였지만, 가만 돌이켜보니 의회와 주위 정객들, 심지어는 군인들에게까지 반발을 사며 전쟁을 수행했고 또 이겼으며, 미국 전체를 분열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노예문제 앞에 그는 인내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사람이었다.
또 그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거의 혼자 힘으로 연방을 수호했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끈질기게 자유를 지켜 낸 사람이었다. 그의 옆엔 언제나 같은 편이 많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모든 이들의 편이었다.
마침내 그는 승리했음에도 패자를 포용하여 연방의 울타리로 끌어안고, 국가를 단합과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일구어 낸 진정한 영웅이었음을 사람들은 인정하게 되었다. 그 순간 그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했던 많은 결점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죽기 직전 게티즈버그에서 했던 아주 짧고도 간결한 연설을 기억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즉 명예롭게 죽어간 용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했던 대의를 위해 우리도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리라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평생토록 수많은 실패와 시련 속에서도 한심하도록 우직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간 링컨에게 결국 사람들은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의 인생은 마치 우여곡절의 삶 속에서 좌충우돌하다가 마침내 연로한 나이에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선 성경 속의 자신과 같은 이름인 아브라함과 닮은 삶이었다.
그저 소박한 바람을 담아 이름 지어준 아들 앞에 성경의 인물처럼 엄청난 시련의 인생이 기다릴 줄은 그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에 못지않은 사후의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것 역시 그의 아버지로서는 더욱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링컨은 자신의 네 아들 중 막내아들의 이름을 토머스로 지어줌으로써 그런 아버지를 추억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른 두 아들처럼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고 하버드를 갓 졸업한 큰 아들 로버트만이 홀로 남아 아버지인 대통령의 장례를 치른다. 링컨이 56세의 생일을 맞은 지 두 달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