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겨진 두가지의 발자취
역사를 걸어간 지도자들 중 상반되는 두 사람을 뽑아 간단히 비교 분석해봤다. 지도자가 나라를 이끄는 모습을 관찰해나갈 때 시금석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이다.
불세출이라 일컬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소유했고, 당대의 국민들로부터 거의 맹목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똑같이 56세에 죽은 카이사르와 히틀러.
물론 우리의 현실과 그들의 상황은 다르다. 하지만 극단적인 지도력을 펼쳤던 그들을 통해 지도자의 자질과 성품이 국민과 주변 나라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새겨봄직은 하다. 두 사람이 역사에 남긴 교훈은 너무도 판이하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귀족출신이지만 특별한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그다지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사치를 좋아해서 많은 빚을 졌어도 별 걱정이 없었던 태평스러운 성격이었다. 아마도 젊었을 때 부모 속 꽤나 썩혔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문제는 그 외에도 조금 더 있었다.
그는 미모의 부인이 있었어도 당대의 사회규범에 걸맞지 않게 애인을 여럿 두었고, 그 중 자신을 암살한 브루투스의 어머니도 포함된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경우, 정략적인 관계를 빌미삼아 용의주도하게 애인으로 만들 정도로 그의 작업(?) 실력이 대단했다.
서유럽(갈리아) 정복전쟁을 치를 땐 로마 본국으로 보내는 전령 편에 따로 자기 여자들에게 소식 전하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로, 어찌 보면 좀 철딱서니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3만의 로마 병력으로 30만의 갈리아 병사들을 상대하던 긴박한 전쟁 중이었음에도 그에게는 그토록 정신적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역사가들로부터 인기있는 연구대상이 된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영국을 포함해서 라인강과 도나우강 이남의 서유럽 대륙을 모두 정복한다. 이후 라인강과 도나우강은 수백 년 동안 로마의 국경선으로 정착 된다. 이어서 그 땅에 로마식 고속도로와 학교, 도시 등의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주고 야만인이었던 주민들을 문명화 시킨다. 전 영국수상 처칠은 그를 일컬어 역사상 서유럽인들의 가장 큰 은인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조국 로마에게도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로 지중해는 로마의 완벽한 내해가 되지만, 그는 당시 권력기구였던 로마 원로원에 의해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원로원이 그의 개인적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도약
그러나 천성적으로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던 그는 자신의 위기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만사가 태평스러운 성격인 사람은 뭐든 복잡하게 생각지 않는 법이다.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하여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부하들을 본인들의 뜻에 따라 정적이자 현직 집정관(통령)인 폼페이우스의 군영으로 보내준다. 양쪽이 훗날 치열한 내전을 치를 적이 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격려까지 해준다. 자신의 운명을 철저히 믿었는지, 그에게 조급함이란 티끌만치도 없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기세에 잠시 후퇴해 있던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 승리하여 정권을 잡고 독재자가 된다. 당시 로마의 지도체제는 집정관보다 원로원이 국가 권력의 상위였다. 결국 카이사르가 독재자가 되었다는 것은 막강한 권력인 원로원을 무력화 시켰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때까지 로마는 임기 1년의 2인 집정관이 통치하는 정부가 300년간 지속 되어왔던 모범적인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수백 년간의 국가 전통을 무시하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독재자가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로마가 도시국가였을 때는 시민 대부분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국이 이태리 반도 전체로 넓혀진 로마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를 전 국민이 치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시대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카이사르는 이런 중요한 문제를 간파했다.
실제로 당시 지방 국민들은 투표권이 있었어도 집정관이나 호민관 등을 선출하는 수도 로마의 선거엔 대부분 참여하지 못했다. 길이 멀기 때문이었다. 국민 전체가 아닌 선택 받은 일부에게서만 뽑히는 지도자가 진정한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로마의 속주(屬州)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광대해졌다. 그 넓은 영토를 지배하려면 좀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카이사르는 차라리 로마의 정체를 제정으로 끌고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의 판단은 대부분의 역사가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끝내 공화정 수호자들에게 암살당한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암살 공모자 대표 격인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개인적으로 특히 아꼈던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후에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모두 진압된다. 그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결국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아돌프 히틀러
오스트리아의 시골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그렇지 않아도 공부하기 싫었던 히틀러는 당장 학교를 때려치운다. 어머니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외톨이가 된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으로 가서 화가를 꿈꾸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군 징집을 피해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 암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는 자기 나라도 아닌 독일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전쟁을 겪는다. 군대에 가기 싫어 도망 다니던 그가 막상 입대하게 되자 용감한 전쟁 영웅이 되었고, 일급 철 십자 훈장을 받으면서 독일군 하사관으로 진급한다.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 패망에 대한 원인을 깊이 있게 이해한 몇 안 되는 독일인이 될 정도로 그는 명철함을 갖게 되고 군 정치 장교가 되어 활동하던 중, 1919년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한다. 이후 히틀러는 1923년 나치당의 책동에 의한 뮌헨 폭동을 일으키는 주역이 될 정도로 당 내에서 빠르게 성장하지만, 그 일로 투옥되어 약 1년간의 수감생활을 한다.
이때 그가 감옥에서 썼다는 [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히틀러의 구술에 의해 함께 수감생활을 하던 동료인 루돌프 헤스가 쓴 책이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나치당은 그의 영도아래 성장을 거듭한다. 일개 지방의 작은 정당에 불과했던 나치당이 지루한 투쟁 끝에 1932년의 전국 총선에서 의회 다수당이 되었고, 결국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그를 수상에 임명한다.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히틀러는 정적들을 모두 몰아낸다. 그리고 이듬해 늙은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재빨리 의회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은 종신 대통령(총통)에 오른다.
세계 1차 대전에서의 패전 후 독일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이 지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잡자마자 거짓말처럼 국가를 안정시키게 된다. 게다가 패전했을 때의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독일 군대를 증강 발전시킨다.
물론 한편에서는 1차 대전 전승국들을 정치 외교적으로 무력화시킨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집권한지 단 3~4년 만에 해 치워버린다. 이쯤에서 그는 비스마르크를 뛰어넘는 천재적인 정치가라는 찬사에 휩싸이게 되고 그의 야망은 더욱 높아간다.
또 다시 세계대전으로
군사적인 준비가 끝난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작으로 히틀러의 야망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듬해는 체코 폴란드 등의 동 유럽을 간단하게 점령해버리고 1940년 중반, 당시 강대국 중 하나인 프랑스를 베네룩스 3국과 함께 단 6주 만에 접수한다.
1차 대전에 패한 이후로 한없이 표류하던 독일을 집권한지 8년 만에 이렇게 만든 것이다. 9세기의 칼 대제 이후 독일 역사에서 이런 걸출한 영웅은 없었다. 그러니 당시 독일국민들이 그에게 열광한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의 전광석화 같은 점령 작전은 독일군 기갑사단들에 의한 빠른 기동 때문에 가능했다. 일명 전격전(電擊戰)이라고 한다. 독일은 이미 구데리안 장군에 의해 새로운 전술 개념을 수립하고 있었다. 기갑사단을 주 공격무기로 하여 빠른 기동을 중요시하는 그런 전술을 이해한 나라는 그 때까지 독일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천재성은 여기서 끝난다. 이후로 그는 멸망의 길만 골라서 발을 딛게 된다. 만약 이 쯤에서 그가 암살이라도 당했다면 성공한 혁명가, 또는 나폴레옹과 견줄만한 군사천재로 남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명은 더 길었고,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그의 야망을 꺾을 자가 없었다. 결국 그것은 본인과 독일의 재앙으로 이어진다.
프랑스를 손에 넣었던 전쟁 초기,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지중해 아프리카 지역을 무시함으로써, 그는 그토록 빠르게 영광의 길로 인도했던 독일 민족을 다시금 서서히 몰락의 길로 몰아넣었고, 후일 이점을 들어 세계의 전략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히틀러의 실수
그렇다면 히틀러가 지중해 아프리카 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만약 그랬을 때 현저하게 달라졌을 독일의 입장을 몇가지로 간추려본다.
1. 지중해 아프리카를 쥐고 있으면 중동의 석유를 무제한 공급받을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독일에 저항하던 유일한 나라인 영국은 반대로 원유공급이 차단됨.
2. 또 터키와 이란 쪽에서 러시아 남부의 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위협하게 됨으로 잠재적 적국인 소련의 발을 묶어놓을 수 있음.
3. 그리고 지중해를 빼앗음으로 당시 세계최고의 영국 해군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음.
4. 게다가 수에즈운하 통로가 막혀 고무와 철강 등 아시아에서 유입되는 영국의 주요수입물들이 모두 차단됨.
5. 결국 독일이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어떤 나라보다 우위에 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외롭게 저항하는 영국과, 이미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놓았던 소련을 제외한 전 유럽을 한데 묶어 가공할 힘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임으로, 결국 1942년 미국의 참전은 가능치 못했을 것임.
이런 전략적 요충지인 지중해 아프리카 지역을 팽개친 채 히틀러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백여 년 전에 겪었던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는다. 결국 독일은 소련의 광활한 전쟁터와 혹독한 겨울날씨에 발이 묶이게 되고, 막대한 물자와 인원, 그리고 노력을 탕진한다.
이후 1942년 미국의 참전과 소련 전선의 독일군 궤멸로 독일은 공세에서 수세로 밀리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사람이 달라지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리기 시작한다. 스스로에게도 그랬지만 타인에게도 관대하지 못한 그의 성품 탓이었다.
그는 독일의 전쟁영웅들, 즉 기갑사단의 아버지 구데리안, 지략의 천재 만슈타인, 야전의 명장 롬멜 등의 의견을 모두 묵살한다. 이때부터 오로지 그는 자신만의 지각과 판단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는 멸망의 길을 향해 스스로 걸어간다.
1945년 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 개인의 광기와 독선의 제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 국민들뿐만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제 맘대로 규정한 열등 국민들인 러시아 슬라브인, 집시, 유태인 등이 대거 살육 된다. 그리고 유럽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신음하게 된다.
결국 히틀러는 1945년 4월 마지막 날, 베를린 총통관저 지하벙커에서 다가오는 소련군의 포성을 들으며 입 안에 권총을 발사한다. 그의 자살은 바로 10시간 전, 느와르 영화처럼 자신과 결혼식을 올린 비서이자 정부(情婦)였던 에바 브라운이 음독자살한 것을 확인한 직후였다. 그렇게 그의 미친 짓이 막을 내릴 때, 그 역시 56세였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두 사람, 그러나 그들 지도력의 결과는 달랐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돌프 히틀러는 똑같은 전략적, 정치적 천재였고 같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이것 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당대의 멋쟁이며 사치를 좋아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소비성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타인에게도 관대했다.
반면 히틀러는 무섭도록 검소하고 자신에 대한 절제가 강했다. 그러면서 타인에게도 지칠 줄 모르는 절제와 끈기를 강요했다. 거기에 넉넉한 품성에서 오는 정신적 여유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들과 부하장병들, 심지어는 자기 연인들에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다 했고, 급기야는 피정복민들에게까지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었다. 당시가 2000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 때는 동서 문명을 통 틀어서 피정복민이라면 거의 무조건 노예 또는 그 비슷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니 카이사르의 관용정신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인 것이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의 훌륭한 전쟁 영웅들에게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 구금, 처형 등으로 일관했다. 그는 가까운 참모들까지도 의심 또는 냉대했고, 심지어 평생의 동지인 괴링 같은 자는 죽으면서까지 체포하라고 유언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질 않았고, 더욱이 책임을 주어 일 맡기길 두려워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 같은 야만적 행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유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며 세계의 누구보다도 문명인이었다는데서, 그의 행위에 대한 더욱 큰 분노를 자아내게 된다.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두 사람이건만 왜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카이사르는 철저한 이성에 바탕을 둔 깊은 통찰력으로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삶을 추구했다. 그래서 특별한 인간애가 그의 정신적 저변에 깔릴 수 있었다.
히틀러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성 자체가 불안했다. 그러니 통찰력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실제로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전쟁이 종말로 치달으면서 그의 광기는 더욱 기승을 부린 나머지 연합군이 진격해 들어오는 독일 전토를 모두 파괴하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우리가 바라는 지도자
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갖춘 지도자라고 해도, 성품과 개성에 따라 이토록 전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더구나 어쩔 수 없이 그들 가는 곳엔 국민들도 함께하게 된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당대의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지난 날,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결의안”이 채택 되는데 앞장섰던 마이클 혼다 의원이 방한하여 연세대에서 강연할 때 한 학생이 물었다.
"위안부 결의안 안건 때문에 일본인 3세로서 정치적 앞날에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혼다의원이 대답했다.
“유권자들이 싫어하면 물러나면 그만이지만, 올바르게 한 일은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대중의 인기는 바람과 같다고 이미 마키아벨리도 경고했다. 지도자가 가장 두려워 할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지도자들 또한 더욱 신중하고 삼가며 역사를 두려워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