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한병철) X 부의 추월차선-Unscripted(엠제이 드마코)
“깜빡 거리는 신호등, 굴러다니는 낙엽도
할 일 하는데 난 왜 이럴까”
-상실의 순기능, 에픽하이 (Feat. 수현)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책 ‘피로사회’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얼마 전 A선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할 힘이 없어.” 밤늦게 걸려온 통화에서 선배의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까지 그저 이야기를 들었다. 다 타고 남은 재가 된 것 같다는 선배는 의사의 처방으로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원에서 학업을 진행하던 친구 B도,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줬던 친한 후배 C도 그랬다.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든 뉴스에 나와 존재를 비추는 동안, 우울증은 그림자처럼 더욱 짙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두 권의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아픔에 대한 철학자와 기업가의 진단을 만나보았다. 한병철 철학 교수의 <피로사회>와 기업가 엠제이 드마코의 <부의 추월차선-Unscripted>.
신분제 사회에서의 ‘갑돌이’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는 성과가 신분을 대체한다. 이러한 성과사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긍정성으로 가득하다. 조선의 갑돌이가 글을 배우고 과거시험에 통과하는 것은 신분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먼저 결정되지만, 대한민국의 민수가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라는 내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즉, 갑돌이와 달리 민수의 불합격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회’에서 ‘민수가 하지 않은 것’이 된다.
바로 여기서 성과사회는 피로사회가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과잉되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피로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병철 교수는 천장이 정해지지 않은 경쟁사회에서 발발하는 질병이 우울증이라고 제시한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 (Nicht-Mehr-Können-Können)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p.28
한편, 기업가 엠제이 드마코는 문제의 원인을 ‘소비의 굴레’에서 찾는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12~16년을 공부하고 취준의 시기를 지나 시작되는 직장생활. 전쟁을 알리는 알람을 듣고 출근하여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출근길만큼 붐비는 퇴근길 인파에 몸을 던져 집에 온다. 약간의 해방감을 느끼려 할 때쯤 어느새 또 울리는 알람. 그렇게 현대인은 꿈꿨던 자유를 통째로 반납하고, 그 대가로 주말과 자동차라는 자유로운 느낌 조각 몇 개를 얻는다. 답답한 일상을 탈출하려 해봐도 자동차 할부금과 자녀교육비, 그리고 30년 남은 주택융자라는 그물이 그를 묶는다. 소비의 굴레에 단단히 사로잡힌 것이다.
“앞으로 나흘 하고도 토요일 반나절을 이 감내하기 힘든 지옥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나의 꿈은 죽었다. 죽어버린 꿈에 대한 위로금은 자동차가 되고 주말이 되어 있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음을 통찰한다. 낯선 이들과 무리를 짓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쓰며, 권력의 착취로부터 자유를 쟁취해내는 이야기들. 그러나 파편화된 사회는 탈서사화, 즉 이야기의 부재를 낳는다. 그리고 <피로사회>는 중요한 사실을 포착한다. 개인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이야기가 사라질 때, 싸워야 할 대상이 사라진 개인은 그 폭력을 자기 자신을 향해 휘두른다.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p.104)
그렇게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느낌 속에서 자유롭게 스스로를 착취한다.
앞서 철학자가 이야기의 부재를 주목했다면, 기업가는 이야기의 과잉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강하게 구조화되어 우리에게 각본화된 두 가지 인생을 안내한다.
첫째는, ‘인도’다. 이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오늘을 사고 내일을 판다. 소비를 통한 행복만을 누리며, 버는 족족 신용카드 할부 상환으로 빠진다. 엠제이 드마코에 의하면 인도 보행자들은 ‘신용과 어제의 임금이라는 모래밭 위에 라이프스타일(명품, 새 자동차, 오락 등)이라는 집을 짓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산다.’
둘째는, ‘서행차선’이다. 이들은 내일을 사고 오늘을 판다. 소비를 절제하여 저축하고, 투자를 통해 나중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들은 소비를 멈추고 핍절의 삶을 시작한다. 문제는 서행차선 보행자들이 팔아버린 ‘시간’과 ‘젊음’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본화된 이야기 밖의 인생은 불가능하다고 단념하며 살아간다.
<피로사회>의 한병철과 <부의 추월차선>의 엠제이 드마코는 둘다 우선적으로 ‘분노’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피로사회 p.50)
하지만 분노의 대상은 다르다. 철학가는 자신을 착취하는 현실에 대해 각성하고 분노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욕망의 허위성이 폭로되고 자기착취가 중단되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가는 일과 가난, 나태한 안락함 등 지금도 유지되고 진행되는 각본화된 평범한 삶에 대해 분노할(짜증이 아닌)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철학자는 지금까지의 피로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피로를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그것은 우울의 언어가 아니라, 우애의 분위기와 관련된다. 자기착취로 인해 지쳐버린 피로감이 아니라, 창조를 마친 신이 일곱째 날 모든 것을 그만두는 안식과도 같다. 노동과 염려와 구분되는 놀이의 시간. 저자는 한트케의 문장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너에게 지치는 게 아니라,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착취를 멈추고, 타자의 피로 또한 넉넉하게 바라보며 서로의 피로를 함께 즐기는 것.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노래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나 그대가 있지만 힘든 세상이 아니라, 힘든 세상이지만 곁에 그대가 있음을 깨닫고 또 감사해요.” (한동근, 그대라는 사치)
(조금 모호한 느낌이 든다면, <피로사회>의 탁월함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우울증이 지배하는 사회를 언어화하고 날카롭게 진단한 것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철학가가 해결의 실마리를 찬찬히 음미해보도록 제시했다면, 기업가는 독자들이 그 실마리를 마음껏 발견하고 내면화하도록 강조한다. <부의 추월차선>에서 핵심 과정들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는데 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하여,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타라.’ 인도를 걸어가는 보행자들은 평생 소비의 굴레에 묶이며, 서행차선을 이용하는 이들은 절약하며 시간을 다 팔고난 이후에 노년이 되어서야 인생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소비자와 노동자의 수동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세상에 기여하며 부와 시간을 지키는 기업가가 될 것을 주문한다.
(<부의 추월차선-unscripted>은 기존 원작보다 마인드셋을 수정하고 핵심과정을 내면화하는 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 글에서는 구체적 과정들을 다 담지 않았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와, 엠제이 드마코의 <부의 추월차선>. 두 책을 통해 우울증이 지배하는 시대에 대한 철학자와 기업가의 통찰을 살펴보았다. 탁월한 철학자는 지금의 현상을 언어로 설명하였고, 뛰어난 기업가는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제시한다. <피로사회>의 역자가 남긴 문장이 와닿아 이를 소개하며 마치고자 한다.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한병철은 그것을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