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 X 돈의 속성(김승호)]
“I’m sleepless in seoul, 또 밤새 뒤척이고 있다.
불안한 생각들과 후회들이 내 방안에 모여든다.”
-In Seoul 에픽하이(feat.선우정아)
“똑—딱, 똑—딱”
머릿속에서 커다란 시계추가 좌우로 크게 흔들린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체기가 가시지를 않는다. 잔뜩 부푼 것이 배가 아니라 머릿속인걸 보면, 반찬이 아니라 먹으면서 했던 대화가 문제였나 보다.
“거기도 10억이 넘었대요.”
오늘도 어김없이 메인메뉴는 부동산이다. 서울 이쪽저쪽을 헤집다가 경기 외곽지역 및 주요 도시들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주식으로 넘어간다. 테슬라와 언텍트주, 제약회사들의 멀미나는 출렁거림들.
결혼하고 집도 구하려면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투자 공부는 필수이니 나도 더 공부하며 준비해야겠다는 ‘긴장감’이 들다가도, 내가 목표로 정한 지점까지 차를 타고 가서 달리기를 출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박탈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서둘러 달리기 위해 신발끈을 조이다가도, 이렇게 뜀박질을 해봐야 어차피 도착하면 내게 남은 상은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든다. 자본주의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 긴장감과 박탈감 사이를 시계추처럼 계속 왕복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문득 시계추를 멈춰 세우고 다짐한다. 나는 잘 살고 싶다고. 그러자 궁금해진다. 나와 우리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어제는 어땠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의 오늘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이러한 맥락에서 두 권의 책을 만났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김승호 대표의 <돈의 속성>.
먼저 ‘자본주의의 어제’를 보여주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노동’이 자본주의의 윤리로 자리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서양의 오랜 가치와 전통들을 구시대적이라며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시장의 법칙과 근대 자본주의를 외치는 산업화세력의 물결. 베버는 그렇게 시대가 급변하고 있음을 관찰한다. 특히, 베버가 관찰했던 것은 사람들의 삶을 가득 채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의 등장이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윤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강한 심리적 동력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베버는 이런 윤리(베버는 이를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칭한다)가 강하게 나타나는 산업화의 지역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 지역들이 다름 아닌, 종교개혁 세력으로 일컫는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이 퍼진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 발견에 대해 사람들은 시큰둥한 반응이나 정치적 적대감을 보였다. ‘그거 그냥 개신교 사람들이 카톨릭에 비해 세속적이고 돈을 밝혀서 그래!’ 그러나 베버는 초기 개혁교회가 세속적인 삶에 대해 얼마나 강한 적대감을 보였는지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이를 반박한다. 오히려 그는 개신교가 지닌 순수한 종교적 특질에 집중하고, 이를 따라가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중요한 질문 하나를 만난다.
“아-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이 절절한 노래 구절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2020년 버전이라면,
기독교가 지배했던 당시 유럽 버전은 ‘나는 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에서는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비교적(!) 쉬웠다. 일상을 마치고 미사(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사제에게 하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심지어는 헌금을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구원이 확정되었음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직 믿음’, ‘오직 성경’ 등을 기치로 루터 등을 통해 이루어진 종교개혁은 달랐다. 특히 미국개척의 중심으로 알려진 청교도(칼뱅주의자)들은 더 엄격했는데, 자신이 구원받은 존재인지 묻는 질문 앞에 청교도인들이 곧바로 답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 대답은 삶 전체로 답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신께 영광을 돌린다는 하나의 목적 아래 자신들의 삶을 금욕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주어진 사회 내 역할(직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즉 노동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매진했고, 심지어 시간 낭비를 죄악으로 여겼다.
당연하게도 금욕적인 생활과(소비억제) 적극적인 노동생활은(생산증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당시 상인과 자본에 대해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종교 지도자들은 고민에 빠진다. 자본이 축적되면 더 많은 정욕과 유혹이 찾아오면서 사람들은 신앙을 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과 돈을 아끼며 직업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성도들의 열정을 만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당한 방법으로 일을 하여 쌓은 부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환원된다면) 허용되는 것을 넘어 권장되었고, 심지어 윤리적․종교적인 찬사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종교적 윤리는 노동자에게는 ‘조직적인 시간관리’를, 자본가에게는 ‘종교를 통한 심리적 정당성’을 제공했고, 이는 곧 자본주의의 새로운 윤리이자 정신으로 이어졌다. 1) ‘조직적인 시간관리’와 2) ‘심리적 정당성’은 자본주의라는 자전거의 두 바퀴가 되어 질주하기 시작했고, 종교라는 아버지는 그 자전거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 이후 자전거는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나 혼자서 달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노동으로 돈을 버는 행위(수단)를 통해 종교적 가치(목적)를 실현하고자 했다면, 사람들의 종교적 열망이 희미해지자 돈을 버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된 것이다. 그 변화된 주행은 많은 길을 지나온다. 계몽과 이성을, 과학기술과 허무를, 이념과 성장을 지나 마침내 오늘에 도착한다.
(하)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