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을 하루 앞둔 책을 한숨 쉬며 덮었다. 등산 가방에 얼음물과 초콜릿을 넣고 한의원으로 달려갔다. 침을 다 맞고 옷을 갈아입는 아빠가 보였다. 옷에 머리만 넣은 아빠는 팔을 허공에서 휘젓고 있었다.
나는 구시렁거리며 아빠의 팔을 잡아 옷의 팔 구멍에 구겨 넣었다. 빨리 산에 갔다 와서 책 읽어야 하는데 옷 좀 미리 입지, 이게 그렇게 어렵나. 그 순간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는 나를 한 번 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옷 하나도 혼자서 제대로 못 입는 아빠는 루이소체 치매 환자다.
아빠가 병에 걸린 지 어느덧 1년, 나의 일상은 많이 변했다. 나만의 시간에 아빠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아빠를 돌보는 날이면 나는 아빠의 보호자로 항상 옆에 붙어있어야 했다. 아빠를 돌보느라 내 공부는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말투는 거칠어졌고 행동은 무례해졌다.
어느 날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동생이 집에 왔다. 동생에게 아빠를 하루만 봐달라고 부탁했다. 오늘은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겠군. 휘파람을 불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무엇인가 이상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동생이 아빠를 데리고 산에 가야 했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에 아무도 없고 문은 잠겨 있어야 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아빠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때 코 고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소리는 동생 방에서 들려왔다. 방문을 열었더니 깊은 잠에 빠진 동생이 보였다.
이불을 확 걷어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동생은 무슨 짓이냐며 이불을 잡아챘다. 동생과 싸웠다. 두 목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아빠가 다가와 말없이 내 소매를 힘겹게 잡아당겼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회사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빠와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크게 싸웠으면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오게 만들어.
“다, 다. 나 때, 때문이야”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병에 걸리고 나서부터 아버지는 부쩍 말수가 줄었다. 내가 투정을 부려도 나를 바라보거나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잘 들리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아서 이제는 제대로 화조차도 못 낸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아차 싶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싸우는 아들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지를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까지 올라왔다.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쯤은 나한테 화를 내거나 서운함을 드러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응어리는 표출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어지지 않는가.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아들을 배려했다. 사람들은 보통 배려를 무언가를 직접 나서서 챙겨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필기구가 없는 친구에게 펜 빌려주기. 식당에서 옷에 음식물이 묻지 않도록 앞치마 챙겨주기. 하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에게 배려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것 아닐까.
어느 날 아침 공부를 하던 중에 화장실로 가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문을 바라보더니 스위치를 더듬었다. 계속 스위치를 만지다가 이내 포기했는지 손을 떼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 시선은 내 방에서 멈췄다.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그냥 침실로 들어갔다. 아들 공부를 방해하기 싫었던 걸까.
“아빠 화장실 가.”
나는 방에서 나와 화장실 불을 켜고 아빠가 들어간 침실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