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미소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피어난 꽃 같았다.’
‘노인’ 하면 제일 먼저 친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하루의 대부분을 이불 속에서 보내셨다. 방문을 열어 진지 드시라고 말하면, 과일을 드리러 가면 항상 할아버지는 침대 위에서 주무시거나 TV를 보고 계셨다. 할아버지께서 움직이시는 순간은 식사하러 나오실 때나 화장실 가실 때, 이따금 산책하러 대문 밖을 나서실 때가 전부였다. 마치 로봇인 마냥 표정도 거의 없으셨다. 가슴에 안은 아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진 속 할아버지, 이름 뜻을 물어보는 손주가 기특해 뜻풀이를 해주실 때 봤던 그 생생한 표정만이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표정 전부이다.
밖에서 마주친 어르신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골목 모퉁이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멍 때리며 낮 시간을 보내시는 분. 정처 없이 학교 운동장을 도시는 분. 낮술을 하시려는지 장수막걸리 한 병을 들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시던 분.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 뉴스에서 또다시 들려오는 고독사 소식. 이런 모습들이 쌓이고 쌓여 내 안에 ‘노인’이라는 성을 구축했다.
맥아리가 없고 외로운 분들, 나에게 노인은 그런 존재였다. 노화는 단순히 몸이 쇠약해지는 신체적 질병을 넘어 외로움의 늪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정신적·사회적 질병이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점이 비수가 돼 나에게 꽂혔다. 그러나 그 견고했던 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두 남자가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는다. 그 순간 손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공을 찼다. 수비수들의 틈 사이로 질주하던 백발의 어르신은 눈을 공에 고정했다. 공이 어르신의 발에 안착했다. 그 분은 공이 안착된 발을 무게중심으로 삼아 다른 쪽 발을 뒤로 뻗었다. 그 발은 공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발과 공이 닿는 찰나 공은 직선을 그리며 골대의 오른쪽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주와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이 모습을 봤다. 보통 사색에 빠져 걷는 편인데 그 날은 그 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 분은 내 인식 속 성에 살고 있는 노인들과는 달랐다. 어르신의 움직임과 표정 하나하나가 나를 매료시켰다. 프로 축구, 아니 다른 일반인 축구에 비하면 더없이 느리고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기였지만 어르신에게는 그것을 능가하는 생명력이 있었다.
어르신의 미소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 같았다. 얼굴에 주름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웃음을 잃어간다. 젊었을 적 먹고살기 바쁜 하루하루의 일상은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갔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울고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일상에서 멀어져 간다. 하루는 더디게 흘러가며 해야 할 일이 없으니 어떻게 하루를 채울지 막막하다. 사회생활을 하며 매일 보던 사람들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 주변의 인간관계는 희미해진다. 목적 없이 하루를 혼자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입꼬리가 올라갈 일은 별로 없다.
사막에서 싹튼 꽃은 아름답다.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난 그것이 내뿜는 생명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치 있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미소가 아름다웠던 이유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