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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땅 내포 가야산

에산 금치리 석조보살입상

by 가야산 이야기

<금치리 석조보살입상>

위치 : 예산 금치리 466~2 보광사

조성시기 : 고려시대

보광사 요사채 앞마당에는 석조보살입상이 1구 있는데, 스님이 약 5년 전에 아랫마을 민가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7월 11일 보광사를 방문하여 스님에게서 미륵불(석조보살입상)의 이운 과정을 설명 들었는데 금치리에서 와우리로 넘어가는 길 옆에 모셔졌던 보살상은 가슴까지 흙에 묻혀 있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사찰로 모셨다고 한다. 매우 친절하신 스님이 문화재 보존에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묻혀있던 미륵불을 사찰에 모셨으니 안내판도 세워지고 세상에 알려 많은 사람들이 미륵불을 통해 위로받았으면 한다고 한다.

보살상은 안면(코 ) 부위의 마멸하고 매우 크고 특이한 둥근 보개寶蓋을 쓰고 있는데 밋밋하고 좁고 빈약한 어깨에 비해 과하게 넓고 불신의 재질과 석질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 후대에 얹힌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돌기둥 같은 신체에 머리에는 보개를 쓴 보살상은 고려 전기 충청도와 경기남부에서(과거에는 평택, 안성지역은 충청도) 유행하던 보살상의 양식으로 홍성 내덕리 석조여래입상,보령 금강암 석불입상 , 안성의 국사암 궁예 석불과 안성 기솔리 석불 입상이 대표적이고 덕산 신평리. 덕산 읍내리 미륵불. 당진 안국사지 석불입상. 삽교 석조보살입상 등 사각 또는 6각의 보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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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입상에 모셔진 금치리는 백제 때는 금물현 신라 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덕풍현. 조선 초에 덕산 현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 때 월조리, 탄리, 금치리, 중안리와 신동 일부를 합한 후 금치리라 하고 예산군 봉산면에 편입되었다.

금치리는 서산의 운산면 와우리로 넘어가는 고개 금치와 관련이 있는데 와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금치 또는 쇠재라고 부르고 고개 아래에 자리한 마을도 금치 쇠재라고 부른다. 옛날에 고개에서 쇠붙이를 캐냈다 해서 금치 쇠재라고 부른다. 석조 보살상이 모셔져 있던 이 마을은 가야산의 양대 중심 사찰이었던 가야사와 보원사를 중심으로 백암사 서림사 등 많은 사찰이 있었는데 17세기 전후로 모두 폐사하게 된다.

바닷길을 통해 가야산으로 들어가는 해미와 운산 삽교천 등 3개 길목 중 하나로 인근의 삽교천의 구만포에서 가야산의 서림사와 보원사 .백암사. 마애삼존불 등으로 들어가는 최단거리에 있다.

애초에 보상상이 세워져 있던 곳은 내륙 깊숙이 이어지던 삽교천을 바라볼 수 있는 월조산 구릉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근대까지 이용하던 구만포까지 7km 고려시대 이용되었다는 궁평리 물길과 조선시대 초기까지 포구로 이용되었다는 효교리의 매향비(바위) 까지는 불과 4~2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내포지역 특히 예산지역의 특히 가야산 일원에 세워진 석불은 삽교천이 흐르는 꼿에서 바라보아야 잘 보이는 독특한 위치에 모셔져 있어 내포에서 큰 바다로 나가는 삽교천 수운의 안녕을 기원하면 조성된 불상으로 볼 수 있겠다. 백제시대 비슷한 목적으로 세워진 화전리의 사면 석불도 직선거리로 2,4km 거리에 불과하다.

석불이 모서진 곳은 삽교천 수운을 통하여 밖으로 이어지는 내륙에서 중국과 오가던 포구와 가까운 곳이다.

내포지역의 석불의 특징 중 하나는 공주나 부여에서 삽교천과 천수만 가로림만을 통해 내륙 깊은 곳의 포구로 이어지는 옛길 주변에 석불이 세워졌는데 특히 가야산 협곡을 거쳐 당진과 서산, 태안. 삽교천을 통한 아산만으로 이르는 길에 석불 조성하여 교역로의 안녕과 평안을 빌었던 것이다

내포지역 (예산. 당진. 서산. 태안)의 석조미륵불(석불) 38기 정도로 조사되는데 금치리 보살상이 더하면 39기로 조사된다.

내포지역 전체로 확대하면 70 여기 정도의 석불이 있어 전국적으로도 석불의 분포 밀도가 최고로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금치리 보살상은 문헌으로 전하는 자료가 없고 기존에 조사된 바 없어 석불의 조성 내력과 연대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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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비슷한 양식의 보살상이 조성되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고 금치리 주민과 보광사 스님의 말씀으로는 마을의 월조산 자락 구릉 쪽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문헌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주민을 대상으로 더 조사해야 할 것이다.

마을에서는 보석상을 “미륵불” 또는 “'갓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보살상 주변은 사지가 아니고 무속인들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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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상은 원래 모두 드러나 있었으나 보살상 주변에 주민이 거주하며 주택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하부가 매몰되었다가 최근 정원 공사 과정에서 드러나 월조산의 있는 보광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재 보광사는 가야산 100여 개 이상에 이르는 폐사지 중 하나로 조사과정에서 주변에 2곳 이상의 폐사지가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은 전체 높이 212m, 두부 높이 59.5cm, 두부 너비 39cm, 목 지름 29cm, 어깨 너비 42cm, 동체부 최내 너비 45.5cm, 보개 높이 13cm, 대좌 니비 161cm이다. 보관은 둥글지만 관모와 같은 형태이며. 아랫부분에 횡선을 2줄로 양각하여 보관대를 표현하였다.

전체적인 상호를 살펴보면 얼굴은 마모되어 눈과 코 윤곽만 보인다. 목에는 목걸이가 있고, 가슴에는 옷 주름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옷과 손 등은 전면에 얕은 양각으로 새겼고, 신체 윤곽은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렸다. 허리 아랫부분과 양 측면 하단부에는 옷 주름이 간략하게 조각되었다.

보살상의 대좌는 부정형 판석으로 대신하였고, 원래 것인지 불분명하다. 조성시기는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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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궁예미륵불

안성기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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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내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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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읍내리

신평리2.jpg 덕산 신평리
삽교석조.jpg 삽교 수암산 삽교석조보살입상
안국사지.jpg 당진 안국사지
20190427_105247.jpg 가야산 마애삼존불


1956년%20구만포구.jpg 삽교천 구만포 1956년
KakaoTalk_20150314_145053573.jpg 현재 구만포
b0794000034003.jpg 화전리 사면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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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예산군지

한국의 사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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