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사와 남연군의 제각 명덕사
한말의 정치인이자 수필가인 운양 김윤식 선생이 면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덕산의 가야산을 자주 여행하고 많은 기록을 면양행견일기에 남긴다. “1894년 4월 6일 丁亥. 아침에 비가 오더니 저녁에 개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 비가 내렸다. 주인과 손님이 걱정하며 앉아 있었는데 오후에 날이 개었다. 마침내 석운(石雲), 초하(蕉下), 도은(陶隱), 이생(李生) 태현(泰賢), 문생(文生) 추(錘), 월해(月海) 스님, 김일관(金日觀), 시동(詩童) 장성록(張成祿), 이우린(李又麟), 최생(崔生) 시철(時澈)과 함께 가야동(伽倻洞)으로 동행했다. 원당곡(元堂谷)을 경유하여 다시 쌍룡폭포(雙龍瀑布)를 보았다. 비 온 뒤라 물소리가 매우 커 전에 비해 더 좋았다. 이로부터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南延君)의 묘소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伽倻寺)의 유적지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예부터 이 산은 왕기(王氣)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 10여 년 뒤에 성인(聖人)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龍興, 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地官)들이 풍수(風水)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 각(閣)을 짓고 비(碑)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陵所) 보다 덜하지 않았다. 보덕사(報德寺)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밤에 절에서 묵었다. 주지 각률(覺律)은 법호가 한송(漢松)으로 해월(月海)의 스승으로 일전에 경산(京山)으로 갔다. 승려는 30여 명이고, 불당(佛堂)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외에 새로 지은 어필각(御筆閣), 칠성각(七星閣)이 있고, 또 여승 2명이 그 곁에 살고 있었다. 저녁에 황석정(黃石汀)이 쫓아왔는데 약속했던 사람이다. 윤성빈(尹聖賓)이 갔다. 현재 집이 교동(橋洞)에 있으니 이곳과는 10리(里)쯤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운양 선생과 가야산 여행을 함께했던 덕산 교동(사동리)에 살았다는 황석정과 윤성빈은 누구일까?
선생의 글에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 각(閣)을 짓고 비(碑)세우는 등의 일들이 서울에 있는 능소(陵所) 보다 덜하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는데 소나무는 일제강점기와 근대 베어져 팔리고 각은 1960년대 헐리고 없다. 왕실에서 최고 기술자를 보내 건축한 보덕사 역시 6.25 전쟁 때 칠성각과 어필각 등 전각은 불타고 현재의 전각은 중창한 것이다. 그나마 남연군의 제각의 흔적은 1872년에 제작된 덕산군 고지도와 승정원일기에서 “명덕사(明德祠)”라는 것과 1954년 항공사진에서 제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 고종 9년 임신(1872, 동치 11) 10월 7일(무오) 조경호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경기전의 일을 마친 후 이어 덕산(德山)으로 가서 남연군(南延君)의 묘소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고, 명덕사(明德祠)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예조 판서도 같이 덕산의 묘소에 갔는가?"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돌아오는 일정에 역참을 배정하였기 때문에 과연 예조 판서와 같이 묘소에 갔습니다."(중략)
보덕사 석등
1954년 남연군묘와 제각 명덕사 항공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