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양 김윤식 면양행견 일기 속의 보덕사
보덕사는 흥선 대원군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백제시대의 거찰이었던 가야사를 대신하는 사찰이지만 전각의 크기와 승려의 숫자 등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다행히도 운양 김윤식의 면 양행견 일기에 많은 기록이 있어 인용한다.
면천에 유배되었던 운양 김윤식 선생이 보덕사와 남연군묘(가야사지)를 자주 여행하며 기록을 남기는데 보덕사는 왕실의 지원으로 창건한다. 한양 최고의 기술자들과 자재를 보내 고종 8년(1871) 창건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당시 활동했던 승려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창건 당시에는 도문이라는 비구가 초대 주지로 있었으며, 운양이 방문했던 시기에는 비구니 사찰로 30여 명의 승려가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덕사는 지금의 전각 배치와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은 불타고 복원하지 못한 어필각(御筆閣), 칠성각(七星閣)이 있다고 기록을 남기고 , 가까이에 있는 남연군의 제각이 (명덕사) 잘 보존되었다고 기록을 남긴다.
면양행견 일기 1893년 4월 6일. 아침에 비가 오더니 저녁에 개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 비가 내렸다. 주인과 손님이 걱정하며 앉아 있었는데 오후에 날이 개었다. 마침내 석운(石雲), 초하(蕉下), 도은(陶隱), 이생(李生) 태현(泰賢), 문생(文生) 추(錘), 월해(月海) 스님, 김일관(金日觀), 시동(詩童) 장성록(張成祿), 이 우린(李又麟), 최생(崔生) 시철(時澈)과 함께 가야동(伽倻洞)으로 동행했다. 원당곡(元堂谷)을 경유하여 다시 쌍룡 폭포(雙龍瀑布)를 보았다. 비 온 뒤라 물소리가 매우 커 전에 비해 더 좋았다. 이로부터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南延君)의 묘소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伽倻寺)의 유적지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옛부터 이 산은 왕기(王氣)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 10여 년 뒤에 성인(聖人)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龍興, 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地官)들이 풍수(風水)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 각(閣)을 짓고 비(碑) 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陵所) 보다 덜하지 않았다. 보덕사(報德寺)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밤에 절에서 묵었다. 주지 각률(覺律)은 법호가 한송(漢松)으로 해월(月海)의 스승으로 일전에 경산(京山)으로 갔다. 승려는 30여 명이고, 불당(佛堂)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외에 새로 지은 어필각(御筆閣), 칠성각(七星閣)이 있고, 또 여승 2명이 그 곁에 살고 있었다. 저녁에 황석정(黃石汀)이 쫓아왔는데 약속했던 사람이다. 윤성빈(尹聖賓)이 갔다. 현재 집이 교동(橋洞)에 있으니 이곳과는 10리(里)쯤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교동은 현재 사동리와 옥계저수지 청풍봉 일원이 된다. 운양 선생은 교동에 살던 묵오 이명우 형제와 교류하며 귀래정과 수초정의 편액을 쓰기도 한다. 덕산과 예산 군수를 역임하는 등 문신이자 학자였던 묵오 형제는 1894년 이후 교동에 은거한다.
한편, 이명우는 운양 김윤식과 박규수(朴珪壽)·김병학(金炳學)·신석희(申錫禧)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94년 동학 이후 아우 이시우(李時宇)와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가야산에 들어가 귀래정(歸來亭)을 짓고서 저술에 전력한다.
저서로는 『묵 오유고(默吾遺稿)』·『경구 수록(警瞿收錄)』·『역학 제요(易學提要)』·『임사 편고(臨事便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