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0~1730년 사이에 폐사한 덕산의 가야사(伽倻寺) 이야기다.
가을 가야사지(伽倻寺址)
지금은 지역에서 조차 가야사지가 별로 관심 없는 유적지지만 미래 후손을 위해 기록을 남기고 사진을 찍어 자료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이 10년이 넘었으니 수군대는 이웃도 있고 이상한 사람이다 말하는 이웃도 있지만 하나하나 모아지는 자료는 가야산 연구자와 후손들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예산군의 관심과 지역에서 이해하고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앞으로 작업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가야사지에 가면 한때 가득 전각을 채웠던 융성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가야산의 신령한 기운을 느낀다. 그터에 서서 쓰러져간 절집을 생각하며 공허함과 쓸쓸함에 오늘도 가야사터를 서성인다.
1690~1730년 사이에 폐사한 덕산의 가야사(伽倻寺) 이야기다.
한 때 내포지역의 랜드마크로 내포지역을 여행하는 관료와 사대부 선비들이 한 번씩을 꼭 찾아 글을 짓고 풍류를 즐기고 조선시대 명소였다.
가야사지는 한때 고려 왕실과 조선의 광해군 아들이지의 원찰이 되어 왕실의 비호는 받고 중창 불사하며 운영되었지만 조선 왕실의 불교 배척과 사대부들을 위한 종이 만드는 고된 작업 노역에 승려들이 절집을 떠나자 결국은 1690~1730년쯤에 폐사한다.
700년 가야사를 대신하여 그터를 지키고 있던 금탑 역시 184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무너지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완전 폐사하게 된다.
보통의 폐사지와 같이 가야사지에는 당간이나 석탑 그리고 승탑 등이 있을법하지만 유물은 와편과 도편 장대석 외에는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
폐사한 가야사는 또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나는 가야사터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현장에서 수년간 가야사의 석탑이 쪼개저 사라지고 계곡의 문화재가 없어지는 걸 보고 자랐다.
삽교천 제방의 높이만큼 가야산은 온몸을 내어주었다.
돌무더기 속에 남아 있던 절집의 석조물은 1970년대 삽교만의 물길을 막기 위해 높은 제방이 만들어지자 모두 실려나가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된다.
그때는 그렇게 삽교천의 물길을 막기 위해 가야사의 유적과 가야산 냇가와 계곡의 자연석은 제무시로 실려나갔다.
다행히도 커다란 감나무라도 신령한 터를 지키고 있어 허허로운 가을 폐사지와 그런대로 어울린다.
감나무에 달린 감은 홍시가 되어가지만 바닥에 떨어지도록 버려두는 모습은 사대부들의 욕심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가야사의 운명과 오늘날 농촌의 현실을 보는듯하다.
감나무는 70년대 후반까지 가야사지(남연군의 제각)에서 이웃의 이 씨 형님이 사셨는데 그때 심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흔한 게 감나무였다.
이제는 이 씨 형님도 떠나고 남연군의 제각도 헐려 누군가에게 팔려나가 흔적도 없다.
잘 익은 주황색의 홍시감 감성을 자극하고 낭만적이니 보기는 좋지만 고령화된 농촌의 현실은 높은 나무에 올라갈 수도 없고, 기다란 장대 휘두를 힘도 없어 홍시를 딸만한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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