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하는 매력 중의 첫 번째는 희곡을 한번 읽어서는 도무지 와닿지 않던 이야기가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믈론 처음부터 재미있는 희곡이 있다. 읽을 때부터 무대가 그려지고 인물이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대부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것이지만, ‘그래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뭐야?’ 라거나 ‘응? 이게 뭔 얘기지?’라고 극의 흐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그런 희곡들은 계속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스토리와 메시지와 인물의 캐릭터까지. 배우는 대사를 외우기 위해서라도 희곡을 여러 번 볼 수밖에 없는데,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기 일쑤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 극단은 더욱 내가 맡은 인물의 대사만 보기 때문에, 극 전체를 볼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인물을 맡은 배우가 대사를 전달하는 감정, 그 대사를 하는 이유, 상황을 이해하려면 희곡을 더 읽어보라고 서로 권한다. 해답은 언제나 그 안에 있으므로.
두 번째 매력은 생동감이다. 같은 연극이어도 매 공연마다 다르다. 관객 반응에 따라서, 배우의 몸, 감정 상태에 따라서, 함께 무대에 오르는 상대 배우의 리액션에 따라서, 심지어는 조명과 음향이 그 장면에 맞게 딱 켜지고 꺼졌는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공연이 된다. 여기에 더블 캐스팅이 된 공연이라면, 배우에 따라 극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연출, 같은 무대, 같은 조명과 음악이어도 인물을 해석한 배우에 따라 달라지는 연극은 그 묘미가 남다르다.
세 번째 매력은 그저 글자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글자로는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을 배우의 몸짓과 대사를 통해 이해하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연출가와 배우에 따라, 음악과 조명에 따라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 우리 극단 ‘좋은 사람들’의 정기공연 ‘영월행 일기’도 이런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연습할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어 배우로는 참여하지 못하고 조명 스텝으로 참여했다. 조명감독은 아니고 오퍼로 참여했다. 조연출이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조명 위치와 색을 잡고 그것을 대사에 맞추어 큐를 미리 입력해 놓은 터라, 극의 흐름에 맞게 버튼만 누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이번 공연을 했던 극장의 조명 콘솔은 디지털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것이어서 대사와 장면마다 어떤 조명을 사용할지 미리 입력을 해 놓을 수 있었고 페이드 인, 아웃(fade in & out) 시간까지 초 단위로 설정해 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손으로 천천히 올리고 내리는 맛을 전혀 낼 수 없는, 인간미가 전혀 없는 콘솔이었다. 물론 디지털 프로그램은 선택사항이어서 인간미를 내려면 낼 수 있었는데 이번 공연은 설정된 값으로 작동시키고자 하는 연출의 의지가 있어서 배우의 대사와 장면에 맞게 버튼을 누르는 일이 조명 오퍼의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큐(Que)가 진짜 많아서 대본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명 오퍼를 여러 번 해봤지만, 이렇게 큐가 많은 극은 처음이었다. 커튼콜까지 무려 78개. 그래서 한시도 무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명을 잘 못 올리면 안 되었으므로.
조명 담당자는 배우들이 한창 연습할 때, 딱히 할 일이 없다. 연습실에는 조명이 없어서 암전하는 장면에서 전기 스위치를 끄고 켜는 일로 분위기를 도와줄 수 있는데 그것도 런(run)을 돌 때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연습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하는 경우는 종종 조명 담당으로 참여했다. 대신 극장을 대관하고 무대를 꾸미는 날부터는 조명 담당자가 절대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대사와 장면에 맞는 조명을 세팅해야 하는데 전체 조명, 부분 조명, 핀 조명, 암전 등등 장면마다 필요한 조명을 한데 묶는 일이다. 그리고 무대 위 배우 위치에 맞게 조명을 맞추어 보기도 한다. 연극에서 조명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밤, 낮, 새벽 같은 일상적인 시간대는 물론이고 회상, 현실, 환상, 가상 등 극의 시간대, 무대 배경, 인물의 감정까지 조명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조명이 켜지고 꺼지는 것에 따라 배우도 한층 더 연기에 몰입하게 된다. 직장인 극단에서 활동하면서 조명 담당자로 희열을 느낀 순간은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조명으로 표현했던 때다. 극의 여운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는 매개체 역할을 했던 순간. 조명을 올리고 내리는 나의 손에 의해 그 빛이 환해지고 어두워지는 순간.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여 하나가 되는 순간.
이번 공연은 프로 연출가를 초빙하여 올리는 작품이어서 기대가 컸다. 아마추어인 우리와 다른 시각을 가진 연출가에게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서 연습하는 모습을 몇 번 봤다. 연습은 대개 인물들 간 대사와 동선을 맞춰보는 것이어서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 대본으로 읽었을 때처럼 극의 내용이 와닿지 않았다. 좀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전체 연습을 봤을 때 좀 재미를 느꼈고 ‘역시 프로 연출가는 다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희곡에는 없던 장면들이 탄생했고 그 장면들은 희곡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희곡으로 읽을 때 재미없던 작품이 좀 재미있다고 느낀 것 이상은 아니었다.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극장에서, 조명이 틀리면 안 되니까, 열심히 한 눈 팔지 않고 여섯 번의 리허설과 네 번의 공연을 몰입하면서 본 결과, 본의 아니게 이 극의 메시지는 무엇이고, 인물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저절로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 대사를 하는지, 왜 그런 장면이 등장하는지를. 아마 관객으로 봤다면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연극은 드라마처럼 재방송을 볼 수 없다. 요즘에는 IPTV, OTT 서비스로 영화도 반복해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극은 한 번이다. 연극팬이어도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보는 사람은 드물다. 여러 번 보아도 그 공연은 매번 다른 공연이다. 네 번의 공연을 보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다. 거기에 배우과 관객이 다 함께 집중한 공연이라면 관객에게는 재미와 감동뿐 아니라 배우와 스텝에게는 만족감, 성취감을 준다. 매 회 공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극의 매력이다. 그리고 글자가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작품이 되는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관객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연극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어 갖는 가장 큰 감동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