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되기

- 직장인들의 이중생활-

by 지홀

"연습하면 안 되는 게 없구나~" 내 연기를 본 엄마의 소감 말씀이다.

"공연 다 끝나고 나니 좀 서운하고 아쉬운 건 없어요?" 동호회 사람들이 물어본다.

"아뇨, 전혀요!! 정말 속이 다 후련해요."

"와~ 정말 열심히 하셨나 보다, 후회 없다고 하시니. 그건 좋은 일이에요~"


무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있었다. 대학시절 방송국 동아리를 했고 방송제를 하면서 재미도 많이 느꼈으니까. 그런데 남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상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방송제는 대본을 보면서 목소리로 흉내만 내는 정도여서 해볼 만했었다. 하지만 몸동작을 하고 표정을 지으며 연기를 하는 일은 완전히 별나라의 일이고, 내 성격상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년도 더 지나서, 문득 직장인 연극 동호회에 가입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연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취미생활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장-집만 왔다 갔다 하며 인간관계도 좁아지고 내 사고의 틀도 너무 고정화, 정형화되는 듯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다른 세상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취미생활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며 가슴이 설레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가슴 뛰는 일 중의 하나는 글 쓰는 일이니까 희곡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큰 작용을 했다.


그래서 직장인 연극동호회를 검색해보았는데, 전국적으로 그렇게 많은 동아리가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어떤 극단들은 꽤 오랜 역사가 있었고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근로자 연극제]에서 상을 휩쓴 극단들도 여럿이었다.


그렇게 올 초부터 직장인 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신입단원들이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는 워크숍에서 도저히 배우 할 용기가 나지 않아 스텝으로 참가하고, 낯선 사람들 틈에서 어색하게 있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지금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새로운 사람들은 됐어.' 하면서 스스로 좁혀왔던 인간관계를 넓히려고 결심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친화력이 좋지도 외향적이지도 못한 경우는 그 특유의 어색하고 낯선 마음을 달래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자주 보고 서로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으니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


6개월을 보내며 극단의 봄 정기공연에 스텝으로 참여하고, '희곡 읽기'모임에서 매주 한편씩 작품을 읽으며 연기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극단 사람들이 "극단에 들어왔으면 배우는 한번 해봐야죠. 우리 극단은 단원들이 많아서 배우 하고 싶다고 매번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신입에게 기회 줄 때 한번 해보세요." 라며 등 떠 미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정말 겁 없이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가을 정기공연 무대에 서게 되었다. 남 앞에서 표정을 지으며 어떤 동작들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그런 마음도 오디션을 보며 꾸욱 참고, 연습할 때는 심호흡을 하면서 떨림, 부담감, 창피함, 오글거림 등등의 오만가지 마음들을 견뎌냈다. 평생 표현 하나 제대로 해보지 않고 무표정하게 살아온 사람이 표정을 자유롭게 짓는 일도 어려웠다. 캐릭터의 마음, 놓인 상황은 알겠는데 그걸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나름 갖가지 표정과 대사톤으로 변화를 주었다고 여겼지만 연출팀은 국어책 읽느냐, 표정이 없다 하면서 다그쳤다. 유난히 땀이 많이 났던 올여름, 그렇게 연습을 하며 보냈다. 연기 잘하는 사람을 붙잡고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고, 연출팀에 물어보고 하면서 조금씩 캐릭터의 대사톤, 동작들을 만들어갔다.


다들 회사 다니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연습실에 와서 거의 자정까지 연습하고 주말에는 5-6시간씩 연습했는데, 처음 한 달은 도무지 연기가 느는 것 같지도 않고 연습을 지켜보던 선배들의 지적에 위축되기만 했었다. 대부분 연기 초보자들로 구성된 극단의 가을 정기공연은 '이대로 잘할 수 있을까? 극단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노력하면 된다'는 진리는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습한 만큼 연기가 늘고, 사람들 앞에서 움직이며 표정 짓는 일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괜찮아졌다는 감상평을 들으며 자신감도 생겼다.


그리고 공연일이 되었다. 이틀간 총 4회 공연.

첫 공연을 마치고 그렇게 환하게 웃는 연출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선배들의 표정도 밝았다. 아마추어 직장인 극단에서 하는 연극이니 기대하지 말고 내 얼굴 보러 오라고 불렀던 지인들이 모두 "참 재미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아마추어라고 보기에는 정말 완성도 있었다"등등을 말해주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작품을 썼던 작가도 직접 공연을 보고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당신 딸이 연기를 할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마가 "재밌다"며 두 번이나 공연을 보셨다. 4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함께 한 배우들이 누구 하나 큰 실수 없이 제 역할을 다했고 음향, 조명, 분장, 진행하는 스텝들 모두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공연을 마치고 나니 작품 하나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해낸 건지 실감이 되었다. 소품 담당자, 의상 담당자, 무대감독까지. 연습할 때는 연기가 안 되는 스스로의 모습에만 빠져서 잘 몰랐는데 공연을 끝내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보였다. 배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는지. 그래서 연극을 종합예술이라고 하는구나!


배우로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 일을 꿈꿔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연습을 하고 공연을 하며 연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공연 시작 전, 무대 뒤에서 긴장하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았다. 막상 무대에 나가면 떨림은 사라지고 연습한 대로 말과 행동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견스러웠다. "진짜 연습하면 되긴 되는구나" 했던 엄마의 말씀이 옳다.


누가 억지로 시키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재미있어서 하는 일. 시간을 투자하고 비용도 들고 육체적으로 힘들고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도 힘들지만 '해냈다'는 성취감과 즐거움이 상당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 안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영역의 일을 했고, 재미까지 느꼈으니 말이다.

앞으로의 극단 생활은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취미를 정말 잘 골랐다.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모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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