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1
오늘의 기온을 확인하지 않고 '어제 비바람 불고 추웠으니 좀 따뜻하게 입어야지'라고만 생각하고 겨울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그래도 추울까 싶어 재킷을 걸쳐 입었다. 더우면 벗을 요량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이미 더워 재킷을 벗었다. 하루사이에 이렇게 큰 기온차가 나고, 일교차도 13도까지 차이가 나는 요즘 날씨는 수상하다. 낮기온이 27도까지 올랐다. 완전 여름날씨인데 겨울 스웨터를 입다니 땀이 날만 하다.
제기동 약령시장에 갔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한약냄새가 정겹게 느껴지고 세상 희한한 약재를 보는 일이 신기하다. 약령시장에는 동대문구에서 운영하는 서울한방진흥센터가 있다.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과 같이 있다. '만원의 행복' 프로그램을 이용하려고 갔는데 조기 마감되었단다. 할 수 없이 약초 족욕체험과 한방체험을 따로 신청했다. 엇, 그런데 1인 8천 원이다. 알고 보니 족욕을 2인 1탕으로 하면 할인이 된다. 체험권을 끊으면 박물관은 무료다. 전통의상체험도 무료인데 조선시대 의사, 간호사 복장을 입어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먼저 한의약박물관을 둘러봤다. 식물성, 동물성, 광물성 약재의 종류와 샘플이 전시되어 있는데 광물성 약재가 낯설었다. 금, 진주, 갖가지 돌 등이 광물성 약재로 분류되었는데 먹을 수 있는지 몰랐다. 처음 보는 각종 약재이름과 효능을 보다가 불현듯 소설이나 희곡의 등장인물 이름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박물관 투어 후 보제원 한방체험실에서 손과 다리를 안마기에 넣고 마사지를 받았다. 외국인들과 함께 체험했는데 일본사람들로 보였다. 초등학교 이상 아이들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에 후배는 어린이날 데려와야겠다고 했다. 손과 다리 마사지 다음에는 침대로 이동했다. 눈 찜질 안대를 하고 눕자 침대 안마기가 신나게 내 몸을 두들겼다. 강도를 세게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등은 아프고 허리와 다리는 세기 정도가 알맞았다. 어쩔 수 없이 등을 침대에서 떼었다 놨다 하면서 몸을 마사지기에 맞췄다. 다 끝나고도 더 누워있고 싶었다. 다음은 족욕제로 쑥을 넣은 물에 발을 담갔다. 야외에 설치된 족욕탕은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휴식을 취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족욕 후 한방센터에 있는 카페가 어떤 곳인가 별생각 없이 갔다. 점심 먹을 시간이어서 음료를 마실 생각은 없었고 어떻게 생긴 곳인가 구경 갔는데 식사 메뉴가 있었다. 연잎밥에 7첩 반상. 식당을 찾아 헤맬 필요 없이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카페에 주방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연잎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나오고 반찬은 어딘가에서 공급받아 보관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밥과 반찬, 미역국이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걸을 겸 약령시장을 한 바퀴 돌며 신기한 약재들을 구경했다. 약재상 간판 중에 "인생은 한방이다"라는 문구가 웃겨 한참 웃었다. 약령시장을 둘러본 뒤 경동시장으로 이동했다. 각종 견과류, 과일, 말린 과일들이 동네 마트보다 저렴해서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곶감, 내가 좋아하는 호두와 말린 무화과를 샀다. 온라인 상품권을 10% 할인할 때 미리 사놨는데 쓰지 못하고 갖고만 있었다. 할인한다고 괜히 욕심부리다가 불필요한 소비를 한 건가 후회한 적 있는데, 오늘에서야 쓸 수 있어 기뻤다. 지류 상품권은 시장이 아니어도 받는 곳이 몇 군데 있지만, 디지털 상품권은 시장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후배가 딸기가 싸다고 하여 따라 샀다. 경동시장을 몇 바퀴 돌며 구경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장 물건, 특히 식재료가 저렴하니까 이거 저거 다 사고 싶었다. 20~30대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것도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더니, 후배가 "이제야, 인생을 아는 거죠"라고 했다. 후배는 얼마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고기는 항상 이 경동시장에서 사셨다면서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는데 마침 그때 우리가 그 정육점을 지날 때였다. 기억을 떠올린 순간에 딱 그 장소에 있다니 놀라웠다. 고기를 사려는 사람들 줄이 무지 길었다. 후배는 "여기 고기가 진짜 맛있어요"라고 하면서 대구 내려가실 때마다 사서 가셨다고 했다.
몇 시간을 돌다가 다리 아프고 지쳐 스타벅스로 갔다. 경동시장에 생긴 스타벅스는 관광명소가 된 곳이다. 그곳에 엘지전자에서 운영하는 체험존이 있는데 커피쿠폰을 준다는 말에 혹해 회원가입을 하고 트롬 체험존에서 퍼스널컬러 진단 후 경품 추첨을 했는데 타월이 당첨되었다. 공짜로 생기니 기분 좋았다. 스타일러 체험존에서는 옷을 스타일러에 넣어 살균해 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직원은 스타일러 내부와 기능을 상세히 설명해 줬는데 하단 수납장 같은 곳이 보여 용도를 물어보니 물을 넣고 빼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청소기도 먼지를 제거하고 물을 버리는 일이 귀찮아 잘 쓰지 않고 밀대로 청소한다. 로봇 청소기는 먼지비움, 충전, 자동 세척 기능이 있어 혼자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물을 넣어줘야 하고 먼지통을 어쨌든 빼줘야 한다. 그것마저 귀찮아하면 어떻게 살림하냐고 하는데 나는 그냥 힘쓰고 물티슈를 버리는 쪽을 택한다.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사람이 물티슈를 이용하는 건 어불성설인데 안타깝게도 이미 편리함에 익숙해진 건 고치기 어렵다. 물티슈를 걸레로 대체하는 일이 많이 어렵다) 스타일러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 말에 바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스타벅스는 옛날 극장 건물 내부를 최대한 살린 곳으로 수용 인원이 200명은 될 것 같은 곳이다. 월요일 낮인데 빈자리가 없었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방황하며 2층 구석진 곳에 빈자리처럼 보이는 쪽으로 갔다. 하지만 그 빈자리 테이블에 뭔가 작은 물건을 내려놓은 청년이 "제가 자리를 옮기는 중인데요. 제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실래요?"라며 원래 앉아 있었던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청년이 알려준 자리는 가장 꼭대기 자리로 스타벅스 실내가 한눈에 쫘악 들어오는 명당이었다.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 자리가 더 좋은데 왜 자리를 옮기려고 할까 의아해했지만, 이유야 어떻든 그저 고마웠다.
계획했던 체험을 잘했고 예기치 않은 경험을 많이 했다.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고 오늘 지나면 곧 잊어버릴 일도 있다. (일테면 한약재 이름) 물건 구매를 잘 못한 게 있었지만 (말린 무화과는 락스 맛이 강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무화과가 유독 하얗더니 표백을 한 것 같다), 공짜 물건을 얻기도 했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난 덕에 기대하지 않은 즐거움을 누렸다. 여러모로 괜찮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