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5
뉴질랜드 남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픽턴(picton)에 다녀오기로 했다. 웰링턴에서 배로 3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다. 픽턴으로 가는 페리는 두 회사가 운영하는데 인터아일랜더(Interislander)와 블루브리지 페리(Blue Bridge Ferry)다. 인터아일랜더는 운항한 지 60년 된 곳이다. 왕복 페리를 탈 생각이었으므로 편도, 편도로 끊어서 두 회사의 것을 모두 체험해보려고 했다. 가격은 왕복의 경우 블루브리지가 뉴질랜드 달러로 10불 정도 싸다. 픽턴은 말보로(Marlborough) 지역에 속하는데 뉴질랜드 주요 와인 생산지다. 픽턴에서 차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블레넘(Blenheim)에 와인 양조장이 많다. 픽턴에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와이너리 투어를 하기 위함이기에 알아봤더니, 픽턴에서 출발하는 오후 반나절 투어가 12시 30분 출발이므로 블루브리지 페리를 이용하라는 쳇지피티의 안내를 봤다. 블루브리지 페리가 픽턴에 11시 45분 도착인 반면, 인터아일랜더는 12시 15분 도착이란다. AI 안내에 따라갈 때 블루브리지 페리를 타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예약하려고 했는데 학생할인을 적용하는 메뉴가 뜨지 않아 직접 사무실에 가서 끊기로 했다. 웰링턴 시내에 나가는 날, 웰링턴 기차역에서 부둣가를 걷는데 블루브리지 사무실이 눈에 띄었다. 길을 찾지도 않았는데 눈에 띄다니 '행운이다' 하면서 들어갔다. 체크인 카운터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여기서 표를 끊을 수 있는지 물어보자 그렇다고 한다. 원래 우리가 가려던 금요일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길래 배가 뜨냐고 묻자, 배가 뜨는데 파도가 좀 높을 수 있어서 뱃멀미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날씨보다는 파도가 너무 높으면 출항하지 않으므로 확인해주겠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그럼 주말에 갈까?"라고 속삭였는데 직원이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물어본다. 반가웠다. 직원은 무슨 요일에 파도가 높은지 상세히 알려줬고 우리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토요일에 갔다가 월요일에 오기로 했다. 얼결에 왕복표를 끊었다. 조카 표는 학생할인까지 받아서 야무지게 잘 끊었다고 여겼는데, 아뿔싸! 인터아일랜더를 탈 기회가 없어졌다. 그 사실을 케이블 카를 탄 뒤에야 깨달았다.
픽턴은 남섬의 시작 도시답게 각종 물류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를 싣고 오간다. 블루브리지는 하루 3회, 인터아일랜더는 하루 6회 운항한다. 화물차 외에 차량을 실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자차를 가지고 탑승하는데 우리는 처음에 몰랐다. 아침 8시 15분 출발 페리의 체크인 시간이 7시 15분이라고 하여 새벽같이 일어났다. 비 오는 새벽이라 우버가 잡히지 않거나 늦게 오면 어떡하나 싶어 미리 예약을 해놓으려고 했으나 10불 이상 비쌌다. 괜히 아까운 마음에 출발 당일에 조금 일찍 불러보기로 했다. 다행히 7분 만에 택시가 도착했고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15분 예상 거리를 10분 만에 갔다. 라운지에는 십여 명이 앉아 있었다. 나는 이렇게 사람이 없으면 운영이 제대로 될까 하며 페리 회사를 걱정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 기우에 불과했다. 페리에 탑승 후 이 자리가 좋을까, 저 자리가 좋을까 하며 좌석을 골라 앉을 생각으로 여유를 부렸는데, 곧 수많은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라운지에는 승객이 많이 없었는데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자동차로 탑승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탑승할 때 없는 길을 따라가는 느낌, 뒷골목을 가는 느낌이 들더니만, 걸어서 탑승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전용 통로를 만들지 않은 것 같았다. 페리에 탑승하면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화물차가 가득 실린 칸으로 걸어 들어가 계단을 한참 올라갔다. DECK 5라고 한걸 보면 5층쯤인가 싶은데,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도 없이 걸어서 갔다. 노약자나 장애인은 이동할 수 없다니, 이 나라에서는 참 드문 환경이다.
배에 올라 항구를 둘러봤다. 엇? 그런데 우리가 타기로 했던 배는 옆에 서 있다. 우리가 탄 배는 다른 이름의 배였다. 제대로 맞게 탄 건지 불현듯 걱정되어 리셉션에 있는 직원에게 물었더니 그 배는 문제가 생겨 아침에 배편이 바뀌었다고 알려준다. 웰링턴에서 픽턴까지 배를 타고 가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말보로 사운드(Marlborough Sound)와 샬롯 사운드(Charlotte Sound)를 지나간다고 되어 있어서다. 뉴질랜드는 피요르드 해안이 많은데 빙하기 이후 홍수로 인해 만들어진 계곡 사이로 흐르는 바다가 절경이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사방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갑판에 나갈 수도 없어 자리에서만 몇 컷 찍었다. 아침으로 싸 온 사과, 키위, 바나나, 삶은 감자와 단백질 바를 먹고 좀 앉아 있자니 졸음이 몰려왔다. 간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3시간도 못 자고 일어난 탓이 큰 것 같다.
실컷 자고 일어났더니 픽턴에 거의 도착했다. 비 때문인지 도착 예정시간인 11시 45분을 훌쩍 넘겨 12시 넘어 도착했다. 탑승했던 경로대로 걸어 내려와 화물선이 실린 칸에 다다르자 자동차와 화물차가 빼곡히 늘어선 채 하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걸어서 탑승한 사람들은 화물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육중한 화물칸이 "크아아앙"하는 웅장한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열렸다. '설마, 차가 먼저 내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바람대로 사람이 먼저 내렸다. 배에서 내린 사람을 태운 셔틀버스가 터미널에 데려다주었다. 터미널에 내린 사람들은 마중 나온 사람을 만나 어디론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조카와 나만 덩그러니 터미널에 남았다. 비가 내려서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숙소까지 걸어서 15분. 날이 좋다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갈 거리인데, 어떻게 하나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우버를 부를까 했는데 우버가 없다고 뜬다. 세상에, 우버가 없는 곳이라니. 로컬 택시 회사가 검색되어 전화했다. 벨이 한참 울려도 안 받다가 한 남자가 받는다. 숙소를 알려주며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갈 수 있냐고 했더니, 자신은 지금 다른 손님을 태웠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한다. 휴대폰이고 운전 중이기 때문인지 전화감이 떨어졌다. 어디 어디에 전화해 보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픽업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말만 알아듣고, 전화번호 아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모른다는 대답이다. 일단 고맙다고 말한 뒤 끊었다. 택시 회사가 한 곳 밖에 없고 게다가 택시는 하나라니. 픽턴은 인구가 3,000명 정도라고 하는데 정말 작은 시골 도시다. 조카와 둘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걷기로 했다. 비 온다는 예보를 봤기에 우산을 준비하긴 했다.
막상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가니 걸을 만했다. 조카와 나는 둘 다 배낭만 메고 간 상태라 걷기 편했다. 거세게 내리던 비가 보슬비로 바뀌어 있다. 구글 지도를 켜고 걸었다. 정말 10분 정도 걸으니 도심이 나타났다. 도심이라고 해야 읍내. 한 블록에 걸쳐 식당, 식료품 가게가 주로 늘어선 곳이다. 지도가 가르쳐 준 대로 따라갔는데 숙소가 보이지 않는다. 지도에는 바로 '그 위치'라고 나오는데 없다. 할 수 없이 그 위치에 나타난 옥슬리(OXLEY) 식당에 들어가 물었더니 바로 옆에 있는 OXLEY 아파트로 들어가라고 한다. 이름이 다른데. 내가 예약한 곳은 워터프런트 아파트(waterfront apartment)다. 마침 옥슬리 아파트 관리인을 마주쳐 물었더니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그 아파트에서 관리하는 숙소였다. 셀프 체크인인데 안내를 받지 못했냐고 묻는다. 부킹닷컴(booking.com)에 들어가 봐도 셀프 체크인 방법이 없다. 숙소에서 메시지를 보낼 거라는 내용만 있고 숙소에서 온 내용은 없다. 관리인은 다른 직원을 불러 우리를 안내하도록 했는데, 그 직원은 셀프 체크인 방법이 적힌 종이를 주며 숙소 위치를 알려준다. 길 건너 저기 보이는 곳이 숙소라고.
종이에 적힌 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투베드룸 아파트였다. 나는 원베드룸 아파트를 예약했는데. 둘이 불필요하게 큰 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원베드룸으로 예약했는데 큰 아파트였다. 이 숙소를 택한 이유는 후기가 9.0 이상이고 엄청 깨끗하다는 내용이 많았고 샬롯 사운드를 보는 뷰가 너무 멋있다는 것 때문인데, 비가 와서 그 뷰는 기대이하로 다가왔다. 게다가 너무 넓어서 휑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추웠다. 히터를 켜려는데 잘 켜지지 않아, 관리인에게 전화하여 작동되지 않는다고 했더니 내키지 않는 말투로 작동법을 알려준다. 생전 히터도 안 써본 사람한테 가르치듯. 체크인할 때도 자신들은 셀프 체크인 방법을 알려줬는데 네가 영어 못해서 모르는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더니만. 그런데 희한한 건 항상 내가 할 때는 안되는데 남이 하면 된다는 거다. 컴퓨터도 뭔가 안 되는 것이 있어 이리저리 해보다가 전문가를 부르면 꼭 잘 되듯이. 직원이 말한 대로 눌렀더니 켜진다. '쳇, 전원 누르는 건 다 똑같은데 아까는 왜 안된 거냐고' 그래도 유용한 정보를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히터를 22도에서 켰다가 바람이 따뜻해지면 온도를 올리라는 팁이었다. 처음부터 24도, 25도를 켜면 잘 안된다고 했다.
예약한 숙소 옆에 부킹닷컴에서 봤던 숙소, 에디트(EDIT) 호텔이 바로 옆에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숙소는 우리가 머무는 숙소 비용의 반값이었고 후기 점수가 나쁘지 않았는데, 그 '뷰' 때문에 예약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그 숙소도 방을 잘 잡으면 뷰가 좋은 방에서 머물 수 있다는 걸 위치를 보고서야 알았다. 지금은 비수기라 호텔 객실이 텅텅 비는 때라는 것도 알았다. 뭔가 바가지를 쓴 기분이다. 비수기인데 이렇게 비싸다니. 게다가 그 아파트에 머무는 손님은 우리 밖에 없다. 복층으로 된 그 아파트는 모두 빈 상태다. 옆 집만 관리인인지 주인인지가 상주하는 것 같다. 그러니 원베드룸을 예약했는데 투 베드룸을 내주었겠지.
메인 침실에서 항구가 보였다. 날씨가 좋다면 뷰는 멋있을 것 같다. 너무 추워서 히터를 켜고 일단 침대에서 몸을 좀 녹이려고 했는데 이불에 얼룩이 그대로다. 세탁을 했겠지만,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고 머리카락도 붙어 있다. 보통은 시트로 이불 전체를 씌우는데 여기는 시트가 목에 닿는 부분까지만 덮여있고 이불은 그대로다. 화장실에는 휴지걸이가 없다. 휴지가 변기 뒤, 물 내리는 곳에 놓여있다. 화장실이 2개인데 두 곳 모두 휴지걸이가 없다. 이를 닦다가 천장을 우연히 봤는데 벌레가 기어간다. 아주 작은 벌레가 두 마리 보인다. '저게 뭐지? 진드기인가?' 키가 큰 조카를 불러 잡아보라고 했는데 손이 닿지 않는다. 딛고 올라설 만한 것이 없어 벌레가 도망가기 전 얼른 잡아야 한다며 호들갑을 떠는데 조카가 나를 들 테니 잡으라고 했다. "엉? 네가 나를 들 수 있다고?" "네, 저 힘세요" 이러더니 나를 번쩍 든다. 들린 내가 소리를 질렀다. 조카의 힘 덕분에 벌레를 잡고 보니 개미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개미가 여러 마리다. 어휴, 가성비 떨어지는 숙소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배가 고팠다. 길을 물어보려고 들어갔던 옥슬리 레스토랑(Oxley Restaurant)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순간 휴식시간인가 싶어 물었더니 식사할 수 있다고 한다. 비가 종일 오고 추워서 따뜻한 걸 먹고 싶었다. 수프는 없다고 하길래 시푸드 차우더(seafood chowder)를 주문하고 조카는 소고기 버거를 시켰다. 차우더의 진한 맛을 먹고 싶었는데 '아, 음식마저 도와주지 않는구나'. 내 앞에 놓인 차우더는 올리브 오일이 둥둥 뜬 크림죽이었다. 홍합은 많았지만, 짠 데다가 뜨겁지도 않았다. 미지근한 온도에 크림은 덩어리로 뭉쳐져 있어 도무지 다 먹을 수 없었다. 소고기 비프는 그나마 평범한 맛이어서 먹을만했다. 이 식당은 다시 오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저녁때 지나가다 보니 사람이 많았다. 로컬로 보이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그런 음식맛에 사람이 많다니 희한했다.
대신 저녁에 찾아간 식당은 아주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점심 먹고 타운을 한 바퀴 돌다가 따듯한 불빛에 홀려 갔는데 메뉴판의 음식이 다 먹고 싶은 것들이다. 무엇보다 수프가 있어 좋았는데 저녁에는 다 떨어지고 없다고 하여 아쉬웠다. 하지만, 지중해식 토핑을 얹은 피자, 오징어 튀김인 칼라마리(calamari), 작은 양배추 구이를 시켰는데 간이 딱 맞아 맛있었다. 디저트도 먹고 싶었지만 둘 다 너무 많이 먹어서 포기했다.
비가 종일 내려 딱히 갈 수 있는 곳이 없고, 점심은 맛없던 데다가 숙소는 기대 이하로 더러워 기분이 가라앉았는데 저녁을 잘 먹고 났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한결 나아진다. 그 사이 숙소는 히터로 따듯해져서 추운 곳에 있다 들어가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