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투어

2025. 7. 6

by 지홀

블루브리지 페리를 탄 이유는 오후에 와인투어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예약한 와인투어가 두 번이나 취소됐다. 와이너리를 도는 hop on, hop off 투어는 예약이 꽉 차서 안된다고 하고, 와인시음이 포함된 투어는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면서 취소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도착하는 날 아무 일정이 없게 되었는데, 어제 종일 비가 내리고 배가 예정시간 보다 늦게 도착했기에 투어 취소된 게 잘 된 셈이다. 추운데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숙소에 머물다 타운을 거닐다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 것이 더 나았다. 그래도 픽턴에 온 이유는 와이너리 투어(Winery Tour)를 위해서였기에 어제 열심히 검색했다. 블레넘 출발 와인투어는 많은데 픽턴 출발하는 건 찾기가 어려웠다. 검색을 픽턴 출발 와이너리 투어라고 다시 했더니 광고 상품이 뜬다. 날짜를 확인했더니 일요일 출발도 된다고 나온다. 취소되었던 투어도 웹사이트에서는 된다고 해서 예약하고 금액까지 지불했는데 취소된 터라 먼저 전화로 문의했다. 일요일 오후, 픽턴 출발하는 상품이 가능한지. 전화를 받은 직원은 가능하다면서 숙소에서 픽업도 가능하다고 어디에 묵는지 물었다. 숙소를 말했더니 워터프런트 아파트(waterfront apartment)는 정차가 애매하므로 그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픽업한다고 알려준다. 걸어서 1분 거리. 가까운 거리였다. 점심이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먹을 걸 준비하라고 알려준다.

쨍한 햇빛을 무척 오랜만에 보는 듯 하다. (11:20)


오늘은 다행히 날이 갰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눈부신 항구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비싼 숙소비를 낸 보람을 조금 느꼈다. 특히 2층에서 바라본 항구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조카와 둘이 점심으로 픽턴에서 유명하다는 토스티(Toasti) 음식을 가져가기로 했다. 12시에 여행사에서 픽업하기로 했기에 11시 30분쯤 가게로 갔다. 가게 안은 민트색으로 단장된 깔끔한 토스트 가게였다. 토스트 메뉴에 김치가 있어 신기했다. 아마도 최근에 생긴 메뉴가 아닐까 싶었는데 물어보지 않았다. 조카와 나는 둘 다 그 정도로 외향적이지 못해 그냥 우리끼리 궁금해하고 말았다. 양파와 치즈가 들어간 클래식 토스트를 두 개 포장해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맛있는 냄새'에 끌려 하나를 나눠먹기로 했다. 마치 '이삭 토스트'같은 느낌의 맛이었다. 맛있었다. 조카는 반 개만 먹고 관두기에는 아쉽다며 마저 다 먹겠다고 했다. 그렇게 포장해 간 보람 없이 그 자리에서 토스트를 다 먹었다. 점심을 먹었으니 와인만 마시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비스킷을 챙겼기에 정 배고프면 그걸 먹자고 했다.


12시에 "말보로 와인 투어(Marlborough Wine Tours)"라고 적힌 밴(van)이 정류장에 왔다. 나이 지긋한 분이 오늘의 가이드 겸 운전사였다. 우리 둘만 하는 거의 프라이빗 투어다. 2명 이상이면 출발하는 상품인데, 딱 우리 둘이었던 것 같다. 전화위복이다. 와이너리를 도는 hop on, hop off 버스는 와인 시음 비용이 별도였다. 일종의 교통편만 제공하는 셈인데 비용이 그리 싸지 않았다. 프라이빗 투어는 꽤 비쌌는데, 이 상품은 일인당 NZD 185.00에 와인농장 4곳의 시음이 포함된 가격이다. 찾아보니 한 곳의 와인 시음 비용이 대체로 20불 내외인 것 같은데 실비만 80불. 교통비와 가이드비용을 감안하면 정말 적정한 가격이다. 웰링턴에서 왜 이 투어 상품을 못 찾아서 그렇게 두 번이나 예약 취소를 당했는지 원. 운전사 분의 얘기를 듣다 보니 이 분이 사장님이다. 어제 전화를 받은 분은 부인이고. 두 분이 하는 여행사다. 픽턴 근처에 살기 때문에 픽턴 출발 상품을 운영하신단다. 지금은 비수기라서 여행자가 많이 없다는 말씀을 하는데, 그제야 지금 계절이 겨울이고 와인 농장에 가봐야 포도나무에 포도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 픽턴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수기라는 걸 알아챘는데, 와이너리 투어도 당연히 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에 우리가 예약하는 것마다 취소되었던 거다. 2명의 예약자는 여행상품의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으므로. '정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왔구나. 예전처럼 계획을 미리 짰더라면 그 과정에서 지금 비수기라는 걸 인지했을 텐데. 그러면 숙소도 그렇게 터무니없이 비싼 건 예약하지 않았을 텐데.'


검색하면서 봤던 '포도밭이 쫘악 펼쳐진 푸른 들판'만 상상했다. 햇빛이 내리쬐고 포도밭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의 광고 이미지만 봐서 나도 모르게 지금 계절에도 그런 낭만을 즐길 거라고 착각했다. 웰링턴에서 픽턴 숙소를 예약할 때도 인지하지 못했다. 웰링턴에 그렇게 매일 비가 오고 추웠는데도. 아무리 말보로 지역이 뉴질랜드에서 와인을 생산하기에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진 곳이라 해도 겨울엔 앙상한 포도나무만 있을 거란 생각을 왜 안 했는지, 못했는지 정말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날씨가 겨울이므로 따듯한 옷을 준비해 왔으면서.

맑개 갠 하늘이 어제와 완전히 다른 날임을 암시한다. (11:21, 11:30, 11:30)


아무튼, 픽턴을 출발하는 와이너리 투어 여행사를 찾아 다행이고 오늘 만난 가이드 할아버지는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운전하며 친절하다.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만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와인 시음할 때 취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더니, 다 마시지 못하면 버리는 통이 있으니 그곳에 버려도 된다고 일러준다. 첫 번째로 간 곳은 "세인트 클레어(Saint Claire)" 와인농장이다. 검색했을 때 점심식당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말보로 지역의 와인은 '소비뇽블랑(Sauvignon Blanc)' 와인 생산이 80% 이고 나머지가 피노 누아(pinot noir), 샤도네이(chadonnay), 피노 그리(pinot Gris), 로제 (Rose) 등을 생산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들린 4곳의 와인농장에서 선보인 와인에 소비뇽블랑, 피노누아는 공통으로 들어갔다. 세인트 클레어는 웹사이트에서 많이 검색된 곳답게(?) 시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이 아주 전문가였다. 표정이 웃고 있고 말도 친절하고 입도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고 눈을 맞추며 말하지 않는다. 시음하러 온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모습에 조카와 난 웃고 말았다. 와인농장을 소유한 가족 얘기부터 자신들이 생산한 와인이 세계적인 와인 콘테스트에서 상을 얼마나 받았는지, 각 와인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등등을 설명하는 동안 눈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아주 친절한데 따듯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신기할 정도였다. 첫 시음 와인인 소비뇽 블랑을 따라주고 자리를 비우자 조카가 말했다.


"저분은 AI 같아요"

세인트 클레어 와인농장의 하늘 (13:17, 13:17, 13:36)


조카는 소비뇽블랑을 원샷했다. "어머, 누가 와인을 원샷해!"라며 타박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내 입에는 엄청 시었는데 조카는 그래서 더 맛있다고 한다. 하기는 레몬을 막 씹어먹는 아이니. 조카는 기름진 토스트를 든든하게 먹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능청을 떨었다. 두 번째는 피노그리를 먹었는데 처음 맛보는 품종의 와인이다. 드라이한데 맛이 없었다. 샤도네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품종인데 다른 곳의 샤도네이와 차이를 모르겠다. 그냥 평범한 샤도네이다. 리즐링은 설탕이 많이 들어갔지만 꿀맛이 난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자연 꿀 맛이 났다. 맛있다. 말보로 지역은 '소비뇽블랑'이 유명하고, 소비뇽블랑은 이 집 "세인트 클레어"가 상을 휩쓴 것 같아 조카 주인집 선물용으로 이곳에서 한 병을 구입했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노틸러스(Nortilus)" 와인농장이다. 이곳에서 로제, 소비뇽블랑, 피노누아, 샤도네이를 시음했는데 로제는 내가 알던 단 맛이 아니라 드라이한 로제였다. 말보로 지역에서 생산하는 로제는 전부 드라이하다는데 색도 핑크색이다. 맛도 좋았다. 피노누아는 레드 와인이었다.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30여 년 전 말보로 지역인 넬슨(Nelson)에서 피노누아 품종이 새로 출시되었다면서 마셔본 적이 있는데 그때 마신 피노누아를 화이트로 기억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간혹 마셨던 것도 화이트로 기억하는데, 레드와인이었던 건지 헷갈린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화이트와인으로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레드 피노누아를 마셔보니 약간 떫었다. 이 농장의 와인은 평범했다. 향은 흔하게 맡아본 와인 향이고 맛도 먹어본 맛이다. 세인트 클레어 와인이 왜 상을 휩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세 번째는 "화이트 헤븐(White Heaven)"이란 곳이다. 소비뇽블랑은 세인트 클레어보다 덜 시고 맛있다. 피노그리(Pinot Gris)는 세인트 클레어에서 별로 맛이 없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너무 맛있다. 딱 내 취향이다. 맛을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치즈를 부르는 맛이다. 안주로 치즈를 조금 먹고 싶었는데 그럴 방도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치즈 플래터를 주문했다. 둘만 참여하는 투어의 장점이다. 다른 사람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볼 일도 없다. 가이드 할아버지에게 일정이 늦어지냐고 물었더니 시간 많다고 괜찮다고 한다. 서울에서 와인 마실 때 가끔 치즈와 먹은 적이 있지만 궁합이 좋은지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이 와인은 치즈와 잘 어울린다고 하여 먹었지, 정말 잘 어울린다고 느낀 적 없는데 여기서는 피노 그리 와인을 먹는데 치즈가 너무 먹고 싶은 거다. 플래터에는 치즈 세 가지 종류와 사과, 살구 말린 것, 크래커, 칩스, 잼이 나왔다. 크래커에 치즈를 올려 먹는데 와인이 술술 들어갈 것 같은 맛이다. 두 가지 종류는 먹어 본 치즈다. 직원이 이름을 말해줬는데 브리 치즈는 알아듣고 다른 하나는 못 알아들었다. 처음 먹어보는 치즈는 '태즈만 치즈'라고 마치 단호박을 잘라 놓은 것 같은 색이다. 아무렴 치즈 이름을 모르면 어떤가. 맛있으면 되지. 잼은 너무 달아서 한 두 번 발라먹고 말았다. 가이드 할아버지와 치즈 플래터를 나눠 먹으며 이 농장의 와인이 치즈를 부른다고 했더니 깔깔대고 웃으신다. 피노그리 다음에 드라이한 로제를 마셨는데 치즈와 먹으니 더 맛있다. 그다음 마신 피노누아는 여전히 떫은맛이 느껴졌지만 맛있다. 여기서는 시음이 아니라 주는 대로 다 마셨다. 첫 잔 소비뇽블랑만 다 마시지 못했다.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취기가 도는 것 같다. 조카도 얼굴이 발그레졌다. 피노그리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서울에서 살 수 있냐고 물었더니 전 세계 판매망을 볼 수 있다며 QR 코드를 찍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판매점이 없다.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는 나오는데 한국은 없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피노그리 와인 한 병을 샀다. 어떻게 들고 갈지 난감하지만, 일단 안 사면 너무 아까운 마음이 들 것 같아 샀다.


네 번째 와인농장인 "헌터스(Hunters)"에서는 약간 취한 데다 치즈를 많이 먹고 배가 꽉 찬 상태여서 시음하기 어려웠다. 이 농장에서는 무려 5가지 와인을 시음한다는데 한 모금도 더 들어갈 것 같지 않았지만, 시음해 주는 직원의 성의를 봐서 거절하지 못했다. 조카도 술을 잘 못하는 체질인데 첫 번째 와이너리에서 원샷을 하고 세 번째 농장에서 치즈를 먹으며 무리한 탓에, 역시나 한 모금도 마시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샴페인을 시음했다. 2022년 챔피언을 거머쥔 샴페인이고 샤도네이, 피노누아, 피노 무니에르(Pinot Meunier) 세 가지를 넣어 만든 샴페인이라고 한다. 너무 훌륭한 샴페인인데 한 모금 마시고 도저히 더 마실 수 없어 미안했다. 소비뇽블랑, 샤도네이, 피노누아를 마신 후 '게뷔르츠 트라 미나(gewürztraminer)"라는 와인을 처음 마셨다. 매운 음식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뉴질랜드 채식주의자협회에서 인증한 와인이라고 한다. 가이드 할아버지가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린다고 강추한다. 예전 퀸스타운에 살 때 한국인 학생이 세 들어 살았는데 그때 한국음식을 먹어봤다고 했다. 우리가 시음하는 동안 직원과 가이드 할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듯 서로의 근황, 자식들의 근황을 나누며 얘기를 나누더니 직원이 할아버지에게 와인을 선물로 주었다. 조카와 나는 와인 맛은 고사하고 더는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어서 얼른 일어나고 싶었지만, 역시나 미안한 마음에 아주 소량의 한 모금을 마셨다. 직원은 우리가 충분히 즐기지 않는 것 같아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음을 마치고 나오는데 와인이 필요하지 않냐는 질문을 한다. 어느 농장에서도 받지 못한 질문이다. 와인 사겠냐는 질문을 대놓고 한 곳이 없었고 자발적으로 샀기에, 더 미안했다. 가이드 할아버지에게 선물까지 한 곳인데. 우리가 와인을 살 거라고 기대했는지 모른다. 미안했지만 살 수 없었다. 그곳의 와인 맛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이 완전히 갰다가 다시 흐려진다. 와인농장의 풍경이 정말 예쁘다. (13:37, 13:37, 14:36)


픽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카와 둘이 졸았다. 와인 마시고 약간 취한 상태에서 기분 좋은 꿀잠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제법 맑았고 하늘이 예뻤고 가이드 할아버지는 '저 나이에 운전해도 괜찮을까?'라는 걱정을 떨쳐버리게 안전하게 운전했다. 게다가 친절했고 와인투어는 훌륭했다. 포도가 한창 열리는 계절에 왔다면 풍경이 더 멋졌겠지만, 대신 사람들로 북적대 한적한 느낌은 가지지 못했을 것 같다.


저녁에는 일식과 태국식을 파는 식당에서 팟타이와 카레를 먹었다. 똠양 카레는 적당히 매워 조카 입맛에 맞았고 팟타이는 좀 달았다. 둘 다 소고기를 시켰는데 한 입 먹을 크기로 주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고기가 너무 커 다 먹지 못했다. 만족스런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가 먹고 싶어 어제 갔던 그 식당, 코르타도(Cortado)에 다시 갔다. 어제 먹으려고 했던 애플 타르트를 주문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같이 나온다고 쓰여있는데 타르트만 나왔다. 타르트에 뿌려먹을 크림이 같이 나왔는데 우린 처음에 그게 아이스크림 녹인 건 줄 알았다. 타르트는 막 구워내 따듯했고 자르기 편했고 먹기 좋았다. 달지 않아 더 좋았다.


맛난 와인과 음식으로 하루를 보낸 아주 완벽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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