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7
여행에서 음식은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누구나 맛있는 걸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쁜 상황도 좋게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비즈니스 네트워킹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이고, 기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이유다. 첫날, 비 내리는 픽턴의 을씨년스럽던 기억은 어제 와인투어로 다 사라졌다. 더 완벽하게 사라진 건 애플 타르트를 먹고 나서다. 어젯밤에 숙소에 들어갔을 때는 화장실에서 본 개미가 아무렇지 않았다. 휴지걸이 없는 화장지를 변기 뒤로 손을 뻗어 잡으며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들었다.
픽턴에서 제일 마음에 든 레스토랑은 코르타도(Cortado) 레스토랑이다. 첫날 저녁과 둘째 날 저녁 디저트를 먹고 너무 맛있어서 오늘 픽턴에서의 마지막 브런치를 여기서 먹기로 했다. 어제 가이드 할아버지가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핀란드식 식당이 정말 맛있다고 추천해 줬는데, 양고기, 송아지 고기, 야채 구이, 감자 구이, 팬 케이크 등으로 우리의 구미를 당길만한 메뉴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수프를 팔지 않았다. 픽턴 도착 첫날부터 수프를 먹고 싶었는데 의외로 수프 파는 곳이 없다. 이곳 코르타도 식당에서는 브런치 메뉴로 수프를 판다. 연속 3일 내내 같은 식당을 방문한다. 조카는 시푸드 차우더(seafood chowder)를 먹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첫날 크림죽 같던 차우더 맛에 불신이 생겨, 그 식당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지역의 차우더 스타일이 그런 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뭐 그래봤자 맛없으면 남기면 되므로 주문했다. 거기에 스크램블드 에그 토스트와 토마토소스를 시켰다. 토스트는 익히 아는 맛있는 맛이다. 차우더는 정말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의 모양과 맛으로 나왔다. 역시 첫날 먹었던 차우더는 그 식당의 문제였다. 수프는 기대보다 더 좋았다. 좀 더 진한 맛의 따듯한 수프다. 솔직히 무슨 수프인지 들었는데 잊었다. 그저 먹고 미소가 지어지는 맛에 만족했다. 양이 많아서 이미 배가 찼기에 디저트를 먹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어제 먹은 애플 타르트 생각에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페퍼민트 차와 함께 주문했다. 그런데 오늘은 타르트 위에 딸기잼이 얹혀 나오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이 옆에 놓였는데 그 위에도 딸기잼이 올려져 있다. 그제야 어제 우리가 먹은 타르트에는 아이스크림이 나오지 않았던 걸 알아챘다. 딸기잼이 원래 나오는 것이 궁금해 직원에게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어제 우리가 먹은 게 좀 부실한 타르트였구나' 조카와 나는 딸기잼을 걷어내며 그래도 우린 어제 먹은 타르트가 달지 않아 더 좋았다며 웃었다.
페리 출발 시간까지 식당에서 머물다 천천히 걸어서 터미널로 이동했다. 비가 갠 직후라 날이 맑고 걷기에 적당했다. 아침 10시에 체크아웃하여 픽턴 항구 주변을 둘러봤는데 인터아일랜더 정박장이 더 가까웠다. 블루브리지 페리보다 좀 더 웅장해 보였지만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덕분이다. 웰링턴으로 돌아오는 배는 픽턴으로 갔던 배와 다른 배다. 애초 우리가 탔어야 했던 "connemara"호였다. 화물선 갔던 "strait feronia"호에 비하면 여객선다웠다. 도보 탑승객을 위한 통로가 좀 더 깔끔했다. 에스컬레이터도 있다. 대합실은 더 넓고 좌석도 훨씬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이미 누워서 자리를 차지했는데, 우리나라였다면 눈총 받을 일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비가 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갑판으로 나가 고요하고 아름다운 작고 큰 섬들을 봤다. 날씨가 좋으면 돌고래와 각종 바다 생물을 볼 수 있다는데 눈에 띄지 않았다. 대합실과 연결된 갑판에는 윗 갑판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경치를 보러 올라가긴 했지만 고소공포증과 불안증이 있는 나는 잘못해서 바다에 빠질까 봐 난간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한 걸음씩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경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장관이었다.
픽턴에서 와인투어 다음으로 좋았던 건 멋진 풍광을 본 것이다. 아침에 둘러본 항구 주변은 어디를 보아도 예뻤다. 뉴질랜드 특유의 낮은 하늘과 구름은 물론이고 바다 저 멀리 떠있는 요트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런 자연풍광을 보고 산다면 화 낼 일이 없을 것 같다.
웰링턴으로 오는 배에서 비상상황 모의 훈련 체험을 한다며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지원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가 앉아있던 카페 구역은 모의 훈련 체험을 위해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여, 다른 자리로 옮겨 체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체험에 참가한 사람은 몇 명의 나이 드신 커플과 아이들과 몇 명의 가족이었는데, 어느 나라나 자녀들에게 유익한 교육을 시키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다. 그런데 방송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하도 긴박해서 진짜 비상상황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게다가 카페와 식당이 일제히 문을 닫고 전 직원이 대기하는 모습을 보니 실제상황처럼 보였다. 체험은 간단했다. 위험상황에 닥친 것을 가정하여 구명조끼 입는 법을 알려주고 실제로 구명조끼를 입어보도록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직접 해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안다. 볼 때는 이해한 것 같아도 막상 해보면 허둥대기 마련이다. 회사에서 매년 교육하는 심폐소생술도 볼 때는 다 이해한 것 같아도 직접 하려면 어색하다. 게다가 체화되어 있지 않아 매년 해도 매년 새롭다. 그런 면에서 구명조끼 입는 법을 배워보는 건 매우 중요하다.
웰링턴에 도착해 프라이팬을 사려고 했는데 가게 문을 닫아 다음날 가기로 했다. 대신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블레넘(Blenheim)에서 와인을 두 병이나 사서 배낭에 넣었더니 어깨가 너무 아팠지만,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는 쿠바 거리로 걸어갔다. 십 여분을 걸은 것 같은데 한 삼십 분 걸은 기분이다. 쿠바 거리는 웰링턴 시내를 돌아보던 날 가본 곳이었다. 조카는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데 내가 먹지 않고, 나는 닭고기를 좋아하는데 조카가 먹지 않아 절충안을 찾았다. 마침 깔끔한 태국식당이 보여 들어갔다. 주문을 셀프로 하고 미리 선불하는 곳이다. 조카는 돼지고기구이에 똠양밥을, 나는 닭고기가 들어간 그린 카레를 주문했다. 맛은 아주 좋지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저녁으로 만족할만한 맛이었다.
버스에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하늘을 봤다. 쏟아질 것 같은 별은 아니었지만 제법 많은 별이 반짝였다. 오늘도 무사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