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4
아침 10시쯤 깼지만 침대에서 뭉그적 거리다가 11시쯤 점심 차리러 일어났다. 어제 냉장고에서 발견한 알배추를 넣고 배춧국을 끓이기로 했다. 사다 놓은 지 오래되어 색이 조금씩 변하려던 배추를 잘 다듬어 놓은 상태다. 된장국과 재료는 거의 비슷하다. 배추가 많이 들어간 것을 빼고는. 다시 밥을 전기밥솥에 안치고 국을 끓이는 동안, 조카가 준비한 과일을 먹었다. 조카에게 아침마다 사과 한 개씩 꼭 먹으라는 당부를 하며 키위, 사과, 바나다, 호두 등을 후딱 해치웠다. 프라이팬은 웰링턴에 도착하여 샀다는데 6개월 동안 하도 많이 사용해 코팅이 다 벗겨졌다. 프라이팬도 새로 사야 했다.
오늘도 종일 비가 내렸지만, 부엌일에 필요한 걸 사러 가기로 했다. 문을 열어보니 어제보다는 비가 거세지 않았다. 나가도 될 만한 날씨였다. 대신, 시내까지 가지 않고 동네 읍내에 해당하는 곳의 쇼핑센터에 갔다. 비가 오는 탓에 버스가 제 시간보다 5분쯤 늦게 왔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조카가 교통카드를 놓고 오는 바람에 다시 집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조카가 우산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와중 버스가 다가왔다.
가는 길에 버스에서 다음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오는 걸 또 유심히 들었다. 역시 next stop 다음에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 전광판에 다음 정류장이 표시되며 나오길래 정류장 이름이 읽는 것과 들리는 것이 잘 일치하는지 확인하며 들었다. 난 어딜 가나 문제를 맞히려는 경향이 있다. 맞히면 기분 좋고 그렇지 않으면 기분 나쁘고 궁금하고 해결하고 싶다. "유퀴즈온 더블록"에 나오는 퀴즈를 듣고 대답을 말한다. 말한 답이 맞으면 어깨가 쓰윽 올라간다. 틀리면 정답을 듣고 배운다. '아항, 그렇군'
버스 안의 전광판을 보다가 불현듯 next stop 다음에 나오는 말이 마오리어가 아닐까 싶었다. 전광판에 next stop / 마오리어가 쓰여 있었다. 그 밑으로 정류장 이름이 떴다. 방송에서 다음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올 때마다 전광판에 적힌 마오리어인지 집중해서 귀 기울였다. 적힌 대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 감고 들으면 여전히 다르게 들린다. 아무튼 100% 확신은 들지 않지만, next stop 다음에 들리는 건 마오리어인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쇼핑센터에 내려 부엌용품을 팔만한 곳을 둘러보았다. 한 군데는 꽤 비싼 용기, 그릇, 나이프를 파는 곳이었다. 다른 한 곳은 잡화점인데 부엌용품이 한 구석에 있었다. 그곳에서 손잡이 달린 물병, 도마를 구입했다. 감자칼을 구입하려고 했는데 조카가 진짜 필요 없다고 하여 사지 않았다. 그건 정말 얼마 하지도 않는데. 계산대에서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장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물병에 뜨거운 물을 부어도 되는지 확인했다. 부어도 된다고 박스 포장에 쓰여 있지만,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100도씨 말고 물을 좀 식힌 다음에 붓는 것이 좋다고 알려준다. 나와 조카가 팔팔 끓는 물을 좀 놔두었다가 부어야겠다며 속삭였다. 계산하던 여자는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한국인은 중국인처럼 생겼다는 말을 한다. 뭔가 개운하지 않은 말인데, 그러냐라고만 대꾸하고 말았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서야 그녀의 발언이 '중화사상'에 입각한 말이었을 것 같아 개운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서양인이면 동양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니까 이해할 수 있지만, 동양인끼리는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다. 백번 양보해 동남아 사람이라면 필리핀, 태국, 베트남인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어도, 한중일은 웬만하면 서로 알아본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중국에서 한국의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뉴스를 하도 접해서인지, 괜한 피해의식으로 불쾌했다.
조카를 데리고 도서관에 갔다. 방학 동안 책 한 권이라도 읽게 하고 싶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원어로 읽어보라고 추천했는데 이미 빌려간 책이라 없다. 클레어키건의 다른 책을 검색했는데 다 빌려갔다.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쉬운 책을 골랐다. "어린 왕자"를 검색해 도서관에 비치된 장소를 찾았다. 처음에 "L" 섹션에서 헤매다가 책마다 붙여놓은 알파벳을 이해한 후에야 책을 찾을 수 있었다. 조카가 도서관 회원카드를 만들고 책을 빌렸다. 웰링턴은 서울처럼 도서관 한 곳에 회원을 만들면 다른 도서관을 똑같이 이용할 수 있다. 도서관에 혹시 한국어 소설책이 있나 궁금하여 검색했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교재가 많다. 소설은 작가 이름으로 검색해야 나올 것 같아 노벨문학상 작가인 한강 이름을 쳐보았다.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가 원어버전, 영어버전으로 있다. 역시 위상이 남다른 작가다. 괜히 뿌듯해진다.
집으로 오는 버스가 도서관 바로 앞에 있다. 하도 코 앞이라 얕잡아보고 딱 시간 맞춰 나가려고 했는데, 눈앞에서 한 대를 놓쳤다. 시간표보다 2분 일찍 오더니 금방 출발해 버렸다. 한 대 놓치면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하릴없이 도서관으로 다시 들어가 버스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5분 전에 미리 나가있자고 다짐하며.
집에 도착해 야채볶음을 한 뒤, 아보카도와 연어가 남은 관계로 어제와 같은 메뉴에 야채를 얹었다. 야채를 곁들여서인지 어제보다 더 맛있다. 조카 집에 온 지 4일 됐는데 아주 오래 살았던 사람처럼 모든 게 편하다. 무엇보다 춥게 느껴지던 집에 적응했다. 히터와 전기장판, 서울에서부터 가져간 보온물주머니 덕택이지만 따듯한 침대에 누워있자니 내 집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