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14
뉴질랜드에서 와인 생산지로 제일 유명한 곳은 말보로(Marlborough) 지역이지만, 북섬에서는 와이헤케섬(Waiheke Island)이 그중 하나다. 지난 금요일로 예약했던 투어를 오늘로 바꿨다. 일기예보에 월요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지 않아 페리 타고 떠나기에 아주 적합한 날씨였다. 오클랜드 부두에서 출발할 때는 날이 좀 흐렸지만 와이헤케섬으로 갈수록 햇빛이 쨍하고 하늘은 짙고 푸르렀다. 우리는 페리 왕복 요금과 와이너리를 포함, 섬의 주요 관광지를 도는 버스 투어(hop on, hop off)를 예약했다. 와인시음은 블레넘(Blenheim)에서 충분히 했으므로 이곳에서는 경치 좋은 와이너리에서 식사하고 시간이 된다면 와인시음을 하기로 했다. 버스는 총 15군데에 정차하는데 매 1시간마다 다니므로 물리적으로 하루에 15곳을 모두 다 내려서 볼 수 없다. 게다가 마지막 버스는 5시에 끝난다. 우리는 더구나 오전 11시 페리(지연되어 11시 20분에 탔다)를 탔기에 섬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오클랜드에서 와이헤케 섬까지 배로 45분 정도 걸린다.
와이헤케는 마오리어인데 영어로 폭포수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여기 물이 좋다고 한다. 이곳이 와인생산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1990년대라고 하는데 물 좋은 이유가 한몫했을 것이다. 블레넘은 쇼비뇽 블랑 생산지와 와인으로 유명한데 와이헤케는 어떤 독보적인 포도 품종보다 다양한 품종을 섞은 와인이 유명한 것 같다. 주로 레드와인을 많이 생산한다고 한다.
휴가 오기 전, 와인을 무척 좋아하는 직원이 뉴질랜드의 유명한 와인이라며 사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 와이너리가 이 섬에 있다. 와이헤케섬에 온 이유가 그 와인을 사기 위해서다. 오클랜드에서 무엇을 할지 별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하루는 이 섬을 여행하기로 했는데 잘한 일인 것 같다. 무엇보다 날씨가 정말 좋아 경치가 다 아름답다. 블레넘의 와이너리는 겨울이라 포도나무만 앙상하게 있었는데, 여기도 물론 그렇지만 주변이 더 푸르고 나무들의 잎이 무성하고 햇빛이 좋아 더 푸르러 보이고 더 풍성해 보인다. 우리는 딱 두 군데만 내리기로 했다. 와인을 사야 하는 와이너리와 바닷가. 나머지 정차 지역은 그냥 버스로 둘러봐도 충분해 보였다. 일곱 번째 정류장에서 내렸다. 중국인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 조카와 나, 유럽에서 온 듯한 남자 한 명 이렇게 다섯 명이 그 정류장에 내렸다. 이곳에서 갈 수 있는 와이너리가 여섯 군데인데 길이 하나만 보였다. 목적지는 다 다를 것 같지만 일단 길이 하나이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조카와 나는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초록 들판에 감탄하며 사진 찍기 바빴다. 한 20분쯤 열심히 갔는데 와이너리 입구의 간판이 우리가 가려던 곳과 다르다. '엇, 여기가 어디지?'
유럽인 남자에게 어느 와이너리로 가냐고 물었다. 그는 정하지 않았는데 저쪽이 스토니릿지(Stonyridge) 포도농장이고 여기는 테모투(Te motu) 포도농장이라면서 경치는 스토니릿지가 더 좋고 와인은 테모투가 더 좋다는 후기를 봤다며 영상까지 보여준다. 우리는 스토니릿지로 가야 한다고 했다. 눈으로 보기에 길을 돌아가는 것보다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빠를 것 같았다. 차가 지나갔는지 풀이 누워있어 걸어가도 될 것 같았다. 유럽인 남자는 그럼 자기도 우리랑 같이 가겠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진흙이 밟혔다. 비 온 뒤라 땅에 물이 차서 더한 듯했다. 신발이 엉망 되고 바짓단에 다 묻었다.
"이 길로 가면 안 될 것 같아요"라고 유럽인 남자가 말했다.
"다 온 것 같긴 한데요"라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보세요, 저기 철책이 있어서 넘어갈 수 없어요"라고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철책으로 막혀서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사이 조카는 씩씩하게 제일 앞에서 걷다가 뒤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돌다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과 보조 배터리를 떨어뜨렸다.
"아악~ " 소리를 지르며 그것들을 줍느라 무릎과 허리를 굽혔다가 바짓단, 긴 코트 자락에 진흙을 잔뜩 묻혔다.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길가로 나서자 유럽 남자는 다시 길을 돌아가기 싫다며 그냥 여기 테모투에 가겠다며 가버렸다. 하얀 신발에 진흙이 잔뜩 묻어 기분이 엉망이 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괜히 우리 따라왔다가 재수 없다고 갔나 보다"라고 얘기하며 물티슈를 꺼내 일단 휴대폰과 보조배터리를 닦았다. 충전단자에 진흙이 들어가서 고장 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지와 코트 등에 묻은 흙을 대충 닦아내고 온 길을 돌아가는데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테모투 와이너리에 가려했더니 더 많이 걸어 들어가야 하고, 아무래도 경치는 스토니릿지가 좋을 것 같다는 이유를 말한다. 그렇게 세 명이 길을 빙 돌아 스토니릿지에 도착했다. 와인 시음하는 곳은 비닐하우스 같은 간이 건물이고, 식당은 제법 컸으나 사람이 몇 명 없었다. 네, 다섯 명이 모두 바깥 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물이나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경치는 말 그대로 그림이었다. 광활한 초록빛 들판과 포도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태양은 따스했다. 유럽인 남자가 와인 시음을 하지 않냐고 물어서 먼저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빈 속이라 취할 것 같다고. 셋이 같이 먹으려고 했으나 야외 테이블은 2인용으로만 되어 있어 따로 앉았다. 조카와 유럽인 남자가 신발과 옷에 묻은 흙을 털기 위해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메뉴판을 보다가 신발에 묻은 흙이 신경 쓰여 물티슈로 닦았다.
그런데 옆 테이블의 키위 남자가 갑자기 화장실 가서 닦지 왜 여기서 닦냐며 화를 낸다. 아까도 조카가 화장실 가는 걸 지켜보느라 서 있었더니 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하길래 대수롭지 않게 듣고 앉았던 참이다. 그는 점심 먹을 건데 더럽게 신발을 닦는다고 무례하다며 아주 큰소리로 말해 무안을 주더니, 웨이트리스를 불러서 저 여자가 식당에서 저렇게 신발을 닦는데 어떡하냐는 말까지 한다. 너무 창피했다. 웨이트리스는 손님의 황당한 컴플레인을 듣다가 내게 다가와 괜찮냐고만 하고 갔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솔직히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내도 아니고 신발 벗고 먼지를 턴 것도 아니고, 물티슈로 신발을 좀 닦은 것뿐인데 저렇게 화 낼 일인가 싶었다. 흙이 그 테이블로 넘어간 것도 아니고. 아까도 서 있는다고 뭐라 하더니 내가 동양인이라 무시해서 저러나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자리로 돌아온 조카에게 어떤 음식을 주문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화장실에서 신발과 바짓단을 닦았다. 대충 봤을 때보다 신발에 진흙이 더 많이 묻어 있었다. 가능한 열심히 닦고 자리에 돌아왔다. 조카에게 옆 테이블 아저씨가 화낸 일을 얘기해 주며 별일 없었는지 물었더니 아무 일 없었다고 한다. 기분이 금방 좋아지지 않았지만, 주문한 음식의 모양이 정말 보기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 평화로운 순간을 즐기려고 했다. 화를 낸 그 남자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친구와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그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음식 맛은 훌륭하지 않았지만 풍경 좋은 분위기가 맛을 상쇄시킬 만큼 좋은 곳이었다. 우리 테이블로 참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려고 식탁의 접시 근처까지 날아든다. 손으로 휘휘 저으며 쫒았지만 다시 날아온다. 다른 테이블에는 가지 않는데 우리한테만 유독 더 많이 오는 것 같았다. 무심코 식탁에 떨어졌던 음식을 던졌더니 그 후로 새들이 더 많이 모인다. 잘못했다. 음식과 와인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얼른 먹고 일어났다. 경치를 더 즐기고 싶었지만, 새들 때문에 앉아 있기 힘들었다. 우리가 일어서자, 참새들은 접시에 남은 음식을 대놓고 먹기 시작했다.
유럽 남자는 진즉에 식사와 와인을 마신 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인시음을 하겠냐고 물어보니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하여 다음 장소로 가기로 했다. 그는 우리처럼 바닷가에 갈 계획이라고 말해 거기도 동행하기로 했다. 직원이 부탁한 와인을 구입한 후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갔다. 한 시간마다 오는데 너무 일찍 내려왔다. 좀 더 느긋하게 있다가 와도 될 뻔했는데, 정류장에서 버스를 30분가량 기다리며 일일 동행자가 된 남자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남자의 이름은 파블로라고 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 살고 호텔에서 일하며 휴가로 피지, 오클랜드를 거쳐 프렌치 폴리네시아로 여행 간다고 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한국사람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면서 중국, 일본, 한국에 가봤고 중국에서 생활한 경험도 있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한국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좋았다면 음식이든 거리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텐데, 아무 말이 없었다. 아, 비빔밥이 맛있다고 했다. 근데 그뿐이다.
원탕기(Onetangi beach) 바닷가는 드넓었다. 구름은 손에 잡힐 듯 낮게 드리웠고 태양빛은 강렬했다. 해변에는 애완견을 산책시키거나 조깅하는 사람, 그냥 홀로 걷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다. 모래사장은 단단해서 발이 빠지지 않았다. 조카가 뉴질랜드에서 대학 갈 계획이라는 얘기를 들은 파블로는 한국어와 영어를 하는 건 아주 큰 장점이 될 거라며 격려한다. 유럽에서 한국어 열풍이 불고 있어서 제2외국어로 영어보다 중국어,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셋은 각자 편한 대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냥 걷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했다. 그리 오래 걷지 않은 것 같은데 해변만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거의 1시간을 걸었다. 어느새 시간은 4시를 가리켰다. 파블로는 와이너리 한 군데를 더 들리고 싶어 했지만, 중간에 다른 곳에 내릴 시간은 안될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곧장 부두로 갔다.
5시 페리를 타고 오클랜드로 돌아오는 길,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다가 오렌지색으로 바뀐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게 된 건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갑판 의자에 앉은 보람이다. 비록 비가 뿌리고 바람이 찼지만, 멋진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스토니릿지 와이너리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내게 무례하다고 말한 그 사람이 오히려 무례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것 같진 없었을 텐데, 국적불문 나이 든 사람들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큰 소리를 화를 내는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제 도메인의 오리 연못에 적힌 안내문이 생각났다. 안내문에는 오리에게 먹이를 주지 말되, 만일 준다면 잔디밭에 주라고 적혀있다. 연못에 빵 조각을 던지면 물 안에서 썩어 각종 박테리아가 번식하여 연못이 오염되고 오리는 죽는다고. 우리는 오리가 먹으라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위인데, 그 행위가 오리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니. 그러고 보면 별 악의를 갖고 행한 행동이 아님에도 상대방에게 나쁘게 작용하는 일이 있고,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있다. 나는 실내가 아니고 야외니까 신발에 묻은 진흙을 물티슈로 닦아내며 그게 옆 테이블의 사람에게 불쾌함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화낼 만하다. 처음엔 내가 동양인이니까 저렇게 큰 소리로 사람 무안하게 만드나 싶었으나, 생각할수록 내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겠다. 야외일지라도 식당이고 식당에서는 신발을 닦으면 안 되는 거다.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그가 나를 차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성격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페리에서 내려 파블로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으나, 마주치지 못했다. 부두에 내려 신발 닦는 것까지 같이 했으나(나무 보호를 위해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낼 수 있는 발판이 있다) 페리에 탈 때 보이지 않았다. 굳이 배 안을 뒤지며 찾아볼 일은 아니어서 내릴 때 마주치면 인사하려고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4~5시간의 짧은 동행이었지만 덕분에 덜 지루했다. 조카는 영어회화를 해 보는 시간이어서 더욱 좋았다.
오클랜드에 도착하니 6시다. 조카는 작년에 영어연수할 때 알게 된 친구를 만나러 가야 했다. 오늘은 저녁을 먹어야 한다. 갑판에서 바람을 많이 맞은 탓에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었다. 수프 하는 가게를 찾기가 의외로 어려워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 나 혼자 충분히 찾아갈 수 있는데 조카는 못 미더운 듯 한식당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부둣가에서 가까운 "옛날밥상"이라는 한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기름기가 많은 것을 빼면 얼큰하고 뜨거워 먹기 좋았다. 그러나 "반상"의 음식이 더 내 입맛에 맞았다.
파블로와 와이헤케 섬은 음주운전 단속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곳에 살려면 차를 운전해야 하고 와인 한 잔은 그냥 일상일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스토니릿지 와이너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로컬 사람들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식사하면서 와인 한, 두 잔을 자주 마시는데 그 정도의 양을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데다 식사를 오래 하기 때문에 그 사이 술이 깰 것도 같다. 한가롭고 느긋하게 점심을 두, 세 시간 먹고 와인을 음미하며 멋진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일상인 삶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지루하고 지긋하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런 불만 있는 날보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날이 더 많을 거다. 적어도 나라면. 아무 근심 없이 온전히 자연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던 오늘의 내가 대견하다. 서울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경관, 자연, 풍광을 직접 보고 느끼는 호사를 누리다니 어찌 안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