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빛

2025. 7. 15

by 지홀

와이헤케 와이너리 중에 스페인 음식을 제공하는 곳이 있는데 시간상 가지 못했다. 원탕기 비치에서 걸어서 25분 거리인데 왕복 50분을 걸어야 하고 겨울철이라 일찍 문을 닫기 때문이다. 조카가 스페인 음식을 먹지 못한 걸 아쉬워하여 오클랜드 식당에서 검색했다. 내가 맛집을 검색할 때는 트립어드바이저(trip advisor)에서 주로 찾아보는데 조카는 구글에서 나오는 결과들 중 후기를 보고 결정한다. 엄청 빨리 훑어보고 결정해 놀랍다. 나는 후기를 봐도 참 꼼꼼히 읽느라 오래 걸린다.


뉴마켓에 있는 토스카(Tasca)라는 식당으로 버스를 타고 가려했으나, 30분에 한 대씩 있어 시간 맞추기 애매하다. 그냥 우버를 불렀다. 우버 비용이 대체로 10불 내외여서 둘의 버스비 NZD 5.60, 전철비 8불과 비교해 많이 비싸지 않을뿐더러 버스와 전철 기다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괜찮은 편이다. 우버가 금방 도착했다. 오클랜드 우버의 운전사는 인도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뉴마켓 쇼핑센터에 이르자 내리라고 한다. 우리는 식당으로 가는데 여기가 맞냐고 물었더니 더 가야 한단다. 주소가 있지 않냐고 반문했더니 있다면서, 좀 더 가야 한다고 말한다. 뭐지?


스페인 식당은 아이를 데려온 엄마, 혼자 식사하는 사람, 대가족 단위의 사람들 등으로 아주 편안한 곳이었다. 이곳에 빠엘라를 먹으러 왔으므로 메뉴에서 바로 찾았다. 다행히 점심시간에 주문 가능한 빠엘라가 있는데 마늘과 새우를 넣은 볶음밥을 시켰다. 밥에 샤프런을 넣어 노란빛 밥이다. 거기에 구운 빵에 각종 소스를 찍어먹는 타파스 플레이트와 레드와인에 과일을 넣은 상그리아 한 잔을 주문했다. 상그리아는 가끔 집에서도 만들어먹는데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기 좋다. 얼굴이 빨개져서 많이 마시지 못할 뿐. 웨이터는 당연하다는 듯 내 앞에 상그리아를 놓고 갔지만, 조카를 위한 음료(?)다. 양이 제법 많았는데 둘이 그릇을 싹 비우고도 뭔가 더 먹고 싶었다. 디저트 메뉴를 달라고 해서 봤지만 딱히 입맛 당기는 음식이 없어 망설였다. 조카는 버스 시간을 보더니 지금 나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트갤러리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오늘은 좀 일찍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비가 내렸다. 맞아도 될 정도의 비. 둘 다 모자를 쓰고 바람이 몹시 부는 거리를 뚫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조카가 버스 노선과 어디서 타고 내려야 하는지를 정말 빨리 검색해 다니기 편하다. 버스가 시내로 접어들 무렵, 조카가 창밖을 가리키며 얼른 보라고 한다. 무지개다. 아주 크고 색깔이 선명하다. 그렇게 가까이서 본 무지개는 처음이다. 내 기억 속의 무지개는 언제나 멀리 있고 희미했다. 그럼에도 무지개를 보는 자체로 신기했는데, 이건 진짜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이 아주 뚜렷하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찰나를 놓칠까 봐 손이 빠른 조카에게 얼른 사진 찍을 것을 종용했다. 버스에서 내려 무지개가 든 쪽을 바라봤다.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버스에 있는 누구도, 정류장에 있는 누구도 무지개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나와 조카만 열심히 사진 찍으며 넋 놓고 본다. 뭐든 일상에 녹아든 익숙한 것들은 신비롭지 않다.


아트갤러리가 가까워지자 조카가 입장료 내는 전시까지 보고 싶지 않다며 기다리겠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가끔 같이 미술 전시회에 다녔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다. 조카도 자기가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그런데 그저께, 그그저께 연속 나를 따라다니며 그림을 보느라 지루했던 모양이다. 조카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억지로 그림 보자고 해봐야 마음에 남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좋다한들 자발적인 마음이 들어야 눈에도 마음에도 남는 법이므로.


표를 구입하기 전, 일단 카페로 갔다. 스페인 식당에서 먹지 않은 디저트를 먹고 싶었다.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최대한 자제하지만 뉴질랜드에 여행 와서 많이 무너졌다. 더구나 디저트 식탐이 살아나 달달한 걸 먹고 싶었다. 아트갤러리 카페에서 레몬무스 케이크 한 조각, 웨지감자, 레몬생강차를 주문했다. 레몬생강차는 티백이지만 요즘 딱 내가 즐겨마시는 차를 발견하여 기쁘다. 웨지감자는 열량 높고 몸에 좋지 않지만 추억의 맛으로 시켰다. 30년 전 오클랜드 살 때 처음 먹어본 웨지감자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소금을 살짝 뿌려 짭짤하게 먹는 맛.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웨지감자는 없고 프렌치프라이만 있었다. 지금도 잘 없기는 한데 60계 치킨 집의 웨지감자가 있어 가끔 먹는다. 이 카페의 웨지감자는 크기가 커서 맘에 들지만 케첩과 마요네즈가 나와서 별로다. 짭조름한 맛이 좋은데 기름에 튀긴 맛이 강하다. 레몬무스 케이크는 상큼해서 손이 자꾸 간다.


조카에게 기다리라고 한 후 특별전(A CENTURY OF MODERN ART)을 관람했다. 특별전에 고갱, 모네, 고흐 그림이 많은 줄 알았는데 미국 톨레도 미술관 컬렉션을 전시하는 거라 미국의 현대작가들 작품이 많았다. 그래도 마네, 모네, 르느와르, 고갱, 피카소, 몬드리안, 모딜리아니, 고흐의 작품이 1~2개씩 있고, 전체적으로 눈이 호강하는 전시다.

버스 안에서 찍은 무지개(14:04)

우리나라는 미술 전시회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림 감상을 오래 하기 어렵고 해설도 잘 읽지 못하는 경우가 믾다. 그림을 떨어져서 보라고 '접근금지'를 의미하는 줄을 쳐 놓고 사진 찍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고 당연히 시끄럽게 해도 안된다. 그런데 이곳은 전시 그림 앞에서 사진 찍고 작품 사진도 찍고 그림을 엄청 가까이에서 보며 얘기를 나누고 전화도 받는다. 몇몇 그림은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게 줄을 쳐놨으나, 그림 보는 문화가 달라 신선하다. 직원에게 작품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플래시만 켜지 않으면 된다고 하여 맘에 든 그림 몇 점을 찍었다.


관람객이 별로 없어 그림 감상을 오래 할 수 있고 그림을 그릴 때의 시대상, 화가의 상황 등이 설명된 글을 보며 그림의 이해를 높일 수 있어 좋았다. 규모가 작은 곳이라 오래 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거의 2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카페 문을 닫아 조카가 전시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 오고 추워서 일단 호텔로 돌아왔다. 조카에게 여행경비를 맡기고 조카 카드로 쓰고 다녔기에 1차 정산을 했다. 경비가 충분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웰링턴에서 조카가 자기 생활비로 일부 충당했던 전력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여행경비 부족하다고 말하면 되는데, 내가 확인할 때까지 기다린다. 요즘 세상은 여행하기 편리하다. 환전한 금액이 모자라도 바로 환전할 수 있고 온라인으로 송금도 쉽다. 조카에게 내 돈, 네 돈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용도에 맞게 계좌관리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이 돈 저 돈 섞어서 쓰면 관리가 안되고 나중에는 어디에 썼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물가가 올라서인지 전체적으로 음식값이 비싸다. 웰링턴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오클랜드는 둘이 스프랑 버거만 먹어도 60불이 나온다. 재작년 보다 비싸다. 한 끼에 1인당 20불 정도 감안했는데, 그 예산에 맞는 곳은 오히려 한식당이다. 예전에는 한식당이 비싸서 잘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가성비가 좋다.


저녁에는 또 반상(bansang) 집에 갔다. 그 집 차돌된장찌개가 맛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오클랜드 하늘(14:06, 14:0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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