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

2025. 7. 16

by 지홀

어느새 뉴질랜드에서 마지막 날이다. 점심때 며칠 전에 가려고 했던 "옥시덴탈(occidental)"이라는 식당에 갔다. 수프 하는 집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다. 가보니 식당이라기보다 펍(pub)이다. 아주 오래된 것 같다. 테이블과 의자가 무척 낡았다. 하지만 전형적인 술집 모습에 전통이 느껴져 좋았다. 메뉴판이 적힌 칠판을 보니 벨기에식 음식과 맥주를 파는 집이다. 생맥주 집에서 나는 특유의 술에 절은 냄새가 난다. 가게 안에는 커피 한 잔을 테이블에 놓고 신문 보는 사람, 간단하게 요기하는 사람,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고 단체 손님도 있다. 우리가 안내받은 테이블 옆에는 두 할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는데 그 앞에는 커피가 놓였다. 조카는 여기 남자들은 친구끼리 다정한 것 같다고 했다. 보기 좋았다. 평일 낮 시간에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커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조카는 이 집의 홍합이 맛있다고 한다. 작년에 학교 친구들과 온 적 있다고. 가끔 특정 음식을 아주 싸게 할인할 때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의 수프와 야채샐러드, 버거를 주문했다. 좀 많이 시킨 셈이지만 야채를 먹고 싶었다. 야채샐러드는 당근, 호박을 따듯하게 익힌 후 해바라기씨와 이름 모를 초록잎에 소스를 뿌려 나왔다. 샐러드라고 하여 찬 음식일 줄 알았는데 따뜻해서 좋았고, 소스가 맛있어 만족스러웠다. 수프는 죽처럼 나와서 실망했다. 걸쭉해도 너무 걸쭉하다. 향신료 맛이 나는데 중국음식에서 흔하게 맡던 향이다. 내 취향이 아니다. 대신 수프와 함께 나온 빵은 부드럽고 따듯해 좋았다. 딱딱한 버터를 빵에 바르자 사르르 녹는다. 소고기 버거와 칩스는 조카가 좋아하는 맛 그대로다. 여기는 소고기 굽기 정도가 기본 미디엄 레어(medium-rare)로 나와서 내가 먹기에 곤란하다. 이미 야채샐러드를 먹고 배가 찬 상태라 수프를 다 먹지 못했다. 맛도 입맛에 맞지 않았고. 조카는 내게 "이모는 소식좌"라며 너무 조금 먹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조카가 대식가다. 잔뜩 먹고 배 나왔다고 걱정한다. 나는 두 그릇 먹지 말고 한 그릇만 먹으라고 말하며 운동하라고 알려주지만, 본인이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면 백날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안다. 계산할 때, 웨이터가 음식이 어땠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샐러드가 훌륭했다고 말해주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에 전달하겠다고 한다.

깨끗한 오클랜드 아침의 하늘과 호라이즌 호텔 객실에서 본 풍경(11:37, 11:38, 15:20)

바람이 불었지만 역시 많이 먹은 탓에 시내를 한 바퀴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후에 여기사는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내가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북유럽, 서울에 있다가 이틀 전에야 돌아왔다. 고3인 친구 딸이 뉴질랜드 대표로 과학 경시대회에 나가게 되어 스톡홀름에 가야 하는데, 중동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비행 노선을 중국을 거쳐 가는 일정으로 변경했어야 한다고 한다. 원래는 딸 혼자 보내려 했는데 너무 먼 비행거리와 여러 번 갈아타는 문제로 혼자 보내기 걱정된다며 부부가 같이 갔다고 한다. 얼결에 북유럽 간 김에 코펜하겐과 오슬로를 여행한 후 중국을 거쳐 서울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다 오클랜드로 돌아왔다. 사업하는 친구는 오자마자 여러 일정으로 바쁜 탓에 전화통화만 하다가, 오늘 겨우 시간을 내게 된 거다.


조카는 저녁때 친구를 만나기로 했기에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날 오후 일정은 각자 지내게 되었다. 친구는 아는 사람이 폰손비(ponsonby)에서 카페 개업식을 하므로 같이 가자고 했다. 호텔에서 만나 같이 가기로 했지만, 친구의 오전 일정이 늦어진 탓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페는 친구 지인의 딸과 남자친구가 개업한 것으로 오클랜드에서 제빵, 제과를 배운 후 가게를 열게 되었다고 한다. 타르트 전문 디저트 가게다. 친구가 지인 부부와 얘기하는 걸 듣고 적당히 맞장구도 치며 타르트와 차를 마셨다. 바질크림과 토마토 잼이 들어간 타르트인데 처음은 상큼한 바질향이 좋았으나 먹을수록 좀 느끼해졌다.


타르트 한 개를 다 먹을 즈음, 친구는 다른 일정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 지인은 내게 다음에 뉴질랜드에 오면 꼭 로토루아에 들리라며 인사했다. 친구는 다니는 절의 스님에게 전달할 물건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워낙 공사다망한 친구라 이동하는 사이가 그나마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퇴근시간과 겹쳐 길이 막혔다. 덕분에 얘기할 시간이 길었다. 자주 문자와 전화를 해서 근황은 서로 알고 있지만, 친구의 북유럽 여행기와 내가 이곳에서 뭘 하고 지냈는지 등을 얘기하느라 바빴다.

퇴근길 차량과 저녁노을 (16:54)

절의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공원보다 더 큰 크기의 땅에 스님이 거주하는 집, 손님들이 머물 집과 대웅전 건물이 들어섰다. 드넓은 땅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불상이 놓여있다. 대웅전은 일반적인 사찰의 모양이 아니어서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본다는 걸 곧 잊어버렸다. 스님은 한국의 본 절에서 파견을 보낸다는데 아무 걱정 없이 좋은 환경에서 수행할 수 있다니 복 받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절의 이름이 "남국선사"인데 남국이란 말이 참 이국적이다.


스님을 뵌 후, 친구 직원 집으로 갔다. 서류만 전달해 주면 된다고 하여 차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직원의 부인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간곡히 청해 집으로 들어갔다. 친구는 타르트 집에서 개업집의 매상을 올려주려고 세 박스를 사더니 그중 한 박스를 이 직원 집에 내려놓았다. 직원은 귤, 타르트, 사과 등을 내왔다. 친구와 직원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아는 사람 얘기가 나오면 적당히 추임새를 넣었다. 친구는 만나는 사람들이 많고, 그중에는 일로 만난 사람들의 관계가 사적으로도 확장되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늘 챙긴다. 성격은 내향적인데 일할 때는 외향적이어서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서로 소개하고 친해지게 만든다.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서먹하지만, 나 역시 일할 때는 외향적인 편이라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든다.


직원 집에서 나오는데 다음에 오면 꼭 자신의 집에 들러 같이 식사하자고 말을 한다. 좀 전 타르트 집에서도 친구의 지인이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빈말로만 들리지 않는다. 친구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주고 잘 챙겨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 처음 보는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 테다. 재작년에도 느꼈지만, 친구가 여기서 참 잘 자리 잡고 사는구나 싶어 자랑스럽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태국식당으로 갔다. 친구는 식사 후 가족모임 일정이 있어 나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상태라 더 분주한 모습이다. 친구는 정신없고 산만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며, 다음번에 만날 때는 이 정도로 정신없지는 않을 거라고 설명한다. 태국식당은 재작년에 같이 갔던 식당으로 낯익어 좋다. 음식이 맛있었던 곳이라 한 번 더 오고 싶었다. 식사 도중에도 친구는 톡에 응답하고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호텔로 돌아온 후 1시간쯤 후 조카가 들어왔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무척 아쉽고 슬프기까지 했다. 조카와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더 친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조카는 스무 살이 되고 나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간다며 신기한 듯 말한다. 나는 나이 들수록 그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갈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조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클랜드 절에서 본 하늘(17:2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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