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

2025. 7. 13

by 지홀

푹 잤다. 9시간. 뉴질랜드 도착 후 처음으로 눈이 감겨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조카보다 먼저 잠들기는 처음이다. 그저께는 철학수업이 새벽 1시에 (뉴질랜드는 한국보다 3시간 빠르다) 끝난 관계로 졸렸지만, 어제는 딱히 한 일 없이 자정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 졸렸다. 이제야 바이오리듬이 시차에 적응한 것 같다. 서울에서도 밤 11시 넘으면 굉장히 졸렸으므로. 어쩌면 27층 높이에 있다 내려와서 마음이 더 안정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객실이 8층에 있어 그리 낮지 않음에도 27층에 비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게다가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에 일어났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나면 정말 기분이 상쾌하다. 몸을 회복한 느낌이다. 아침에 급하게 출근해야 하거나 투어를 나가야 하지 않으므로 8시에 눈을 떠도 한, 두 시간 더 침대에 머문다. 더구나 이 호텔에서는 조식 포함을 하지 않아 더 늑장을 부린다.


브런치 메뉴로 얌차(yumcha)를 먹기로 했다. 식당 직원이 음식 트레이를 밀며 테이블을 지나가면 먹고 싶은 것을 골라먹는 홍콩식 점심이다. 튀기거나 굽거나 볶은 각종 야채, 육해공 음식과 딤섬,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 검색해 보니 오클랜드 시내에 맛난 얌차집으로 두 곳이 나온다. 드래곤보트(Dragon Boat Restaurant) 식당과 그랜드 하버(Grand Harbour) 식당이다. 그중 후기가 좀 더 좋은 그랜드하버에 갔다. 식당 문가에 들어서니 홀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찼다. 예약하지 않고 그냥 갔는데 혹시나 자리 없다고 거절당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직원에게 예약하지 않았다고 했더니 괜찮다며 자리를 안내한다. 식당 안은 문가에서 볼 때보다 더 컸다. 문가에서 보이지 않는 안쪽에도 넓은 공간이 있다. 그곳에도 이미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직원은 2~3인용 테이블에 우리를 안내했다. 중국식당의 테이블은 주로 큰 원형테이블로 7~8명이 앉는 테이블이 많은데 그 가운데 자그마한 이 테이블이 참 소박해 보이는 동시에 뭔가 끼여 앉는 기분이다. 게다가 의자 뒤로 큰 음식 트레이가 지나다니는 통로라서 우리는 의자를 벽 쪽으로 옮겨 둘이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 간 간격이 좁아, 옆 테이블의 의자가 내 의자와 거의 맞붙는다. 쾌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편하지는 않다. 손님은 중국인들이 많았지만 키위(뉴질랜드 사람을 키위라 부른다)를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보인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 (15:03, 15:03, 15:04)

우리는 넓은 쌀전병(?)에 새우를 넣은 딤섬(요리 이름을 모른다), 버터 바른 관자구이, 채소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채 볶음, 야채인 줄 알고 시켰으나 야채 아래에 닭발이 들어있는 음식 (결국 먹지 못했다), 닭죽, 시금치 넣은 딤섬, 각종 야채를 넣은 딤섬, 두부 튀김, 다진 소고기, 새우튀김 등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마구 시켰다. 직원이 샤오롱바오를 먹겠냐고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음식은 따로 주문해야 한다고 한다. 딤섬의 최고봉이라는 샤오롱바오는 먹어줘야 한다. 조카에게 육즙이 뜨거우므로 혀가 데지 않게 숟가락에 올려놓고 딤섬을 살짝 터트려 약간 식힌 후 먹으라고 알려줬다. 돼지고기로 만든 딤섬이라 나는 2개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조카가 먹었다. 돼지고기가 몸을 차게 한다고 하여 먹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이건 먹고 싶었다. 그 이유는 "샤오롱 바오"의 명성에 기댄 측면이 많다. 사람은 유명하다는 어떤 것을 보거나 먹거나 입거나 들어보고 싶어 하는 본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소위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 한 것들이 인기를 얻는 것 아닐까.


이것저것 먹고 싶은 대로 시켰더니 테이블에 음식이 한가득이다. "우리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 나는 문득 테이블의 음식을 보며 과연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 조카는 시간 많으므로 천천히 먹자고 했다. 그 와중에도 직원들은 계속해서 음식을 보여주며 먹겠냐고 물어본다. 더 이상 주문하지 말고 테이블에 놓인 것만 먹기로 했다.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눈으로 보고 음식을 골랐기에 얼마인지, 음식 이름은 뭔지 모른다. 직원들이 주문할 때마다 테이블에 놓인 메뉴표에 뭔가를 적고 가길래 들여다봤다. 회전초밥집처럼 작은 접시, 중간 접시, 큰 접시, 특별 메뉴로 구분되어 있고 숫자가 적혀있다. 몇 접시를 먹었는지 계산하기 위함으로 보이는데,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대부분 큰 접시와 특별 메뉴에 표시되어 있다. 메뉴표 뒤에는 주방에 특별히 주문한 음식도 적혀있는데 "샤오롱 바오"인 것 같다. 암호처럼 써진 한자를 모르므로 주문한 가지 수와 표시된 가지 수가 맞는지만 확인했다. 양 옆 테이블의 손님이 바뀌는 동안, 우리는 계속 먹었다. 거의 2시간에 걸쳐 접시를 깨끗이 비우다시피 했다. 마지막으로 과일을 먹고 싶은데 과일 트레이는 지나다니지 않아 물어봤더니 따로 주문해야 한다고 한다. 무슨 과일이 있는지 물었는데 사과가 가능하다고 하여 추가했다.


몸이 아주 충만한 상태로 계산하는데 세상에나, 무려 168불이다. 대략 14만 원 정도다. 점심 한 끼를 꽤 비싸게 먹은 셈이다. 조카는 이렇게 비쌀 줄 몰랐다면서 "작년에 이모 친구가 얌차 사주셨는데 그때도 엄청 비쌌겠는데요!" 하며 새삼 고맙다고 한다. 나도 이리 비쌀 줄 몰랐다. 딤섬은 가볍게 먹기에 괜찮은 식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가격이 오른 것인지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많이 먹은 만큼 걷기로 했다.

도메인에서 본 흐린 하늘과 노란 단풍 나무(15:08, 15:17, 15:20)

브리토마트(Britomart) 역에서 파넬(Parnell)까지 기차를 타기로 했다. 버스는 오클랜드 교통카드(Hop card)로 2명이 탈 수 있는데 전철도 되는지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한다. 파넬까지 편도 티켓을 구입했다. 4불이다. 우버는 우리나라보다 싼 편인데 전철과 버스는 비싸다. 파넬은 90년대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였는데 재작년 추억에 젖어 방문한 거리는 꽤 한산하고 공사하는 곳이 많고 슬럼화가 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 거리가 많이 단장되고 카페와 음식점이 제법 많아졌다. 파넬 거리를 한 바퀴 돌며 예쁜 곳에서 사진 찍고, 뉴질랜드 풍경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화랑에 들어가 그림 구경을 한 후 도메인(Domain)으로 걸었다.


도메인에는 전쟁기념관이 있는데 공사를 하는 관계로 휴관 상태다. 개인적으로 도메인을 좋아한다. 드넓은 잔디 광장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오클랜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전망도 좋다. 그곳에 노랗게 물든 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압도적으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노란 잎의 나무다. 초록색 잔디밭에 떨어진 노란 잎들의 색이 참 조화롭다. 가을 끝자락임을 느끼게 해주는 나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나무가 사람의 발길을 저절로 끌어들이는 마법이라도 쓴 듯.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AI 기술로 지웠다.) 오클랜드는 웰링턴만큼 춥지는 않지만 비가 오고 흐린 날이 계속되어 쌀쌀하다. 겨울 날씨에 가을이 아직 떠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나무를 발견해 반가웠다.


도메인에서 오클랜드 대학까지 걸어갈 수 있다. 중간에 고속도로를 건너야 하지만 신호등이 있어 괜찮다. 숲 속을 거니는 것처럼 나무가 울창한 길을 산책하듯 걸으려고 했는데, 아뿔싸 걷다 보니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나왔다. 오클랜드 대학이 아니라 병원 쪽으로 나왔다. 오클랜드 도착한 첫날, 셔틀버스로 지나갔던 곳이다. 그때 봐둔 길을 따라 시내 쪽으로 계속 걸었다. 고속도로를 건너는 길목에 다다르자,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이 보였다.


"아, 저쪽으로 나왔어야 했는데 아쉽다. 이모가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길이었는데"

"괜찮아요. 다음에 보면 되죠"

"그렇지, 네가 내년에 오클랜드 대학에 입학하면 그때는 저길 걸을 기회가 많을 거야"

"!!... 네~에~"


조카는 그 길을 꼭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으므로 다음에 걸으면 된다고 그냥 별 의미 없이 한 말인데, 나는 그 말을 덥석 물어 꼭 오클랜드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로 말했다.


오클랜드 대학 캠퍼스를 관통해 알버트 공원을 지나 내려오다 아트갤러리에 들렀다. 어제 알버트 공원을 산책하다가 발견한 곳이다. 재작년에 왔을 때는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는데, 아직도 건물 한편은 공사 중이지만 다른 쪽은 문을 열었다. 입장료가 무료라고 쓰여 있어 들어갔다. 어제는 미술관이 문을 닫는 5시에 임박해서 들어가는 바람에 1층 전시장만 쓱 봤다. 뉴질랜드 작가들이 그린 뉴질랜드 풍경 그림과 설치물이 전시 중이다. 한쪽 벽면에 불타는 화면이 길게 늘어섰는데 2024년(?, 연도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에 났던 큰 불을 재현한 비디오 아트가 인상적이었다. 어제 아트 갤러리에 들렸을 때는 그림을 진중하게 볼 계획이 아니라 그냥 휘익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특별전 광고가 눈에 띄었다. 고갱, 모네 등 유명화가의 그림이 전시 중이라니. 그래서 오늘 제대로 볼 계획으로 들렀다. 그런데 시간이 4시다. 1시간이면 충분히 볼 시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특별전은 화요일에 보기로 미루고 어제 미처 다 못 본 무료 전시를 관람했다. 로버트슨이라는 부부가 기증한 그림을 전시하는 곳에 들렀는데 여기도 아주 귀한 그림이 많았다. 폴 고갱, 몬드리안, 폴 세잔느,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의 그림과 로댕의 조각품도 있다. 다른 전시관에서는 통가 출신 호주 아티스트의 비디오 아트가 전시 중인데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작품 해설을 본 후에야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내용임을 이해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작품을 이해하고 보니 물속에서 구조를 외치는 그녀의 몸짓이 정말 위험하게 보였다. 수조에 점점 물이 차오르면서 익사 직전까지 가는 그녀의 모습은 곧 지구의 모습처럼 보였다.


거의 2시까지 점심을 먹었지만 저녁때가 되면 배가 고플 줄 알았는데 전혀 배고프지 않다. 심지어 오늘은 14,000보를 걸었는데도. 조카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여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밤늦게까지 조카와 얘기하고 각자 책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밤 12시가 되어도 배고프지 않다. 아무리 많이 먹었어도 이렇게까지 배가 고프지 않다니 너무 이상하다.

흐린 날 겨울 해의 수명은 짧다(15:3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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