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투어

2025.7. 12

by 지홀

비가 그쳤다. 암막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일출이라는 걸 직감하자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커튼 뒤로 비스듬히 섰다.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는 멋진 광경에 얼른 안경을 쓰고 휴대폰을 들었다.


보코 호텔 (voco hotel)은 IHG그룹 계열의 호텔로 회원에 가입하면 체크아웃 시간을 10시에서 2시로 미룰 수 있다. 호텔에 도착한 다음 날 회원 가입을 한 후 체크아웃 시간을 연장했다. 9시에 아침 식당으로 내려갔다. 뷔페 메뉴가 3일 내내 똑같다. 베이컨, 소시지, 익힌 토마토, 덜 익힌 버섯, 감자튀김, 토마토소스(?)를 끼얹은 삶은 병아리콩, 스크램블드 에그는 따뜻한 음식이고 각종 시리얼과 우유가 찬 음식으로 나온다. 샐러드는 없다. 토스트, 크로와상, 페이스트리 두 종류가 있고 멜론, 수박, 오렌지와 플레인 요거트, 블루베리 요거트가 있다. 통째로 직접 까먹으라고 나오는 과일은 사과, 키위, 바나나, 귤이다. 다른 때라면 까먹기 귀찮아서 손도 대지 않지만 내가 먹을만한 음식이 별로 없어서 매일 깎아 먹었다. 주스는 망고, 비트+사과+레몬을 섞은 주스가 있는데 맛은 별로다. 당근이 들어갔다면 해독 주스인데, 그렇다면 맛없어도 먹었을 텐데 아쉬웠다. 호텔 조식이 그렇듯 첫날은 맛있었는데, 이틀째와 삼일째는 점점 식욕이 사라져 과일만 먹었다.


이 호텔은 샤워실, 화장실이 구분되어 있고 문이 달려 있어서 세면대와 한 곳에 있지만 공간 분리가 되어 사용자가 편리하다. 각 용도에 맞는 일을 나눠서 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다. 침대 헤드보드와 프레임을 연결한 소파가 침대 옆에 있고 그 앞에 비교적 큰 원형 테이블이 있어 노트북을 쓰거나 책을 읽고 룸 서비스로 음식을 시켜 먹어도 될 정도로 활용하기 좋아 보인다. 내 방을 이렇게 꾸미고 싶을 정도로 객실이 마음에 들었다. 단점은 생수를 첫날 체크인 하는 날만 준다는 거다. 일반 생수와 탄산수 2병을 주는데, 그 이후 물을 마시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 체크아웃할 때 무려 8불을 냈다. 그런 줄 알았다면 마트에서 생수를 샀을 텐데 아까웠다.

일출이 아름답다 (07:42, 07:44, 07:52)

2시에 체크아웃하려고 했지만 얼른 27층을 벗어나고 싶었다. 조카에게 날씨가 좋아졌으니 체크아웃을 일찍 하고 돌아다니자고 말했다. 조카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을 더 이상 못 보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다.


12시에 체크아웃했다. 짐을 끌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호라이즌(Horizon) 호텔로 이동했다. 체크인 시간 전이라 호라이즌 호텔에 짐을 맡기고 다니려 했으나, 운 좋게도 객실이 준비되었다고 하여 바로 체크인했다. 스카이시티 호텔(SKY CITY HOTEL)에서 운영하는 곳이어서 스카이 호텔 식음료장을 할인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4층 객실에서 스카이시티로 연결되는 통로도 있다. 직원이 아주 나긋하고 조용한 어조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호텔에 체크인할 때 보증금(deposit)을 걸어야 하는데 뉴질랜드 은행이 발행한 체크카드를 냈더니 200불만 보증금으로 결제한다. 신용카드는 1박에 100불씩 500불을 결제해야 한다고 하더니.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트래블로그 실물 카드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찾지 못해 그냥 왔다. 조카에게 환전한 돈을 보내 조카가 계산했다. 현금 없이, 카드 없이 올 때 하나도 걱정되지 않은 건 순전히 조카가 여기 살기 때문이었다.


호텔객실은 8층에 배정되었다. 바로 앞에 뉴질랜드 방송국 건물이 떡하니 자리 잡아 뷰를 가렸다. 그러나 좋았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조카는 보코호텔 객실이 높은 곳에 있어 좋았다고 한다. 나도 그 나이대는 그랬다. 출장 가서 높은 층으로 배정되거나 가끔 룸 업그레이드와 함께 높은 층에 투숙하게 되면 정말 좋았다. 쉰 넘으며 달라졌을 뿐. 이제는 안정적 높이가 좋다.


객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직원이 웰컴선물이라며 준다. 아마도 5박 하는 손님이어서 주는 것 같다. 초콜릿 3개가 들어간 상자다.


점심 먹을 곳으로 수프 파는 곳을 알아봤다. 그런데 의외로 수프 파는 식당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시푸드 차우더 파는 곳은 여러 곳 있는데 수프 파는 곳이 없다니. 서양식 따뜻한 수프를 먹으면 추위가 가실 것 같아 간절했다. 조카가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부둣가 앞의 식당을 찾았다. 날이 개었지만 바람이 좀 불어 추웠다. 모자가 날아갈 정도다. 부둣가 앞은 비교적 한산한 시내와 대조적으로 브런치를 먹는 사람들과 배 타고 섬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댔다. 토요일 아침다웠다.


보코호텔에서 체크아웃 후 호라이즌 호텔에 체크인하면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는데, 이상하게 숨 쉬기가 편하지 않았다. 점심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왜 그런지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 어려웠다. 높은 객실을 떠나 이제 괜찮은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뭐라도 먹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다. 어린 조카가 걱정하는 게 싫어 말도 꺼내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이 증상을 진단하며 심호흡을 했다.


부둣가 앞에는 식당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북적대고 한 곳은 한산했다. 조카가 검색했던 곳은 북적대는 곳인데 너무 복잡해 보여서 한산한 곳으로 들어갔다. 나는 오늘의 수프를 시켰는데 컬리플라워 스프라고 했다. 조카는 생굴을 시켰다. 웨이터가 오늘 생굴 가격이 특별가격이라고 강조한 데다 조카가 굴을 좋아한다. 생굴 6개에 30불. 이 식당이 한산했던 이유는 메뉴판을 볼 때 알았다. 수프가 NZD 25.95다. 옆집은 15불 정도인데.

생굴은 레몬즙을 뿌려 먹으니 맛있지만 정말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다. 조카는 아침을 많이 먹어서 배고프지 않다고 했다. 아침 뷔페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나는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 음식을 먹고 나니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맑게 갠 하늘을 보니 언제 그렇게 폭우가 내렸나 싶다 (09:57, 09:57, 13:18)


식사 후, 오클랜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며 눈여겨봤던 알버트 공원(Albert Park)에 가기로 했다. 감으로는 걸어서 갈만한 공원인데 조카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고 했다. 조카가 버스 노선을 귀신같이 잘 찾아서 아주 편하다. 공항에서 구입했던 교통카드(hop card)로 버스를 탔다. 마운트 이든(Mt. Eden)을 지나 한참을 가도 나오지 않는다. 어디서 내리냐고 물어보니 조카가 갑자기 사색이 된다.


"이모, 제가 잘 못 알았어요. 알버트 공원이랑 마운트 알버트랑 같은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나는 큭큭대고 웃었다. 기왕 버스를 탄 거니 마운트 알버트(Mt. Albert)까지 가보자고 했다. 여기 살 때 잠깐 몇 개월 살았던 곳이라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동네에 내려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의 뉴질랜드 운전 면허증에는 이 동네 주소가 적혀있다. 운전면허증을 가져왔다면 살았던 집을 한번 찾아가 볼 텐데, 기억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한 바퀴 휘익 둘러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알버트 공원에서 내렸다. 알버트 공원은 시내에 있다. 그 주변에 오클랜드 대학이 있다. 나도 익히 (Auckland University) 아는 공원이다. 이름을 몰랐을 뿐.


알버트 공원 산책 후 시내로 들어와 성패트릭 성당(St. Patrick Cathedral)에 들어갔다. 어제보다 낫고 아침보다 나았지만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떨쳐지지 않은 상태라 진정시키고 싶었다. 성당에 가만히 앉아 기도했다.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나기를.


시내를 걷다가 추억의 장소에서 잠시 멈췄다. 스미스 & 코히(Smith & Caughey) 백화점. 어제 지날 때는 밤이라 닫힌 쥴 알았는데 오늘 보니 아예 폐점했다. 1880년에 개장 후 2025년까지 145년간의 기록을 쇼윈도에 전시하는 중이었다. 괜히 내가 아쉬웠다. 삼십 년 전 여기 살 때 나도 자주 들르던 백화점. 고급진 물건을 팔던 곳. 아쉬운 마음에 건물을 찍고 마지막 전시내용을 찍고 그 건물을 빙 돌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 하는 백화점을 꼼꼼히 둘러봤다.


그 길에서 우연히 푸드코트를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탈리안 식당, 베트남 식당, 일식당, 술집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도 한국식 치킨을 파는 곳이 있다. 한국식 치킨의 인기가 대단한 걸 또 실감한다. 푸드코트답게 각자 원하는 가게에서 주문한 후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서 식사한다. 그중 "정글 8(Jungle 8)"이란 술집에 갔다. 이곳은 별도의 공간으로 푸드코트 테이블이 아닌 가게 테이블에서 식사한다. 식사 메뉴는 동남아시아 음식으로 거의 안주거리로 먹는 것들이다. 손님은 애들을 데리고 온 가족을 비롯해 젊은 사람, 중년, 노년 등 연령대가 다양한 무리들이 삼삼오오 앉았는데 모두 로컬 사람들이다. 예약하지 않았다고 하니 6시 30분까지 먹고 갈 수 있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다. 5시였으므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QR로 주문하고 결제하는 시스템인데, 우리는 주문만 하고 기다렸다. 5시 30분이 넘어가는데 음식이 나오지 않길래 주문이 안된 건가 하고 다시 확인했더니 결제를 하지 않아 주문이 안된 상태였다. 하마터면 먹지 못하고 나올 뻔했다. 30분이나 멀뚱히 앉은 손님을 보면 주문했냐고 물어볼 법도 하건만.


가지튀김, 파파야 비프 샐러드, 와규 스테이크, 두부 튀김을 시켰는데 정말 양이 적었다. 가지튀김에는 가지가 없고 튀김옷만 두껍게 있었다. 파파야 비프 샐러드는 맛있었고 와규 스테이크는 스테이크라기보다 슬라이스 한 몇 조각의 소고기였다. 레어 미디엄 굽기여서 나는 손도 대지 않았으나 조카는 맛있게 먹었다. 두부튀김은 맛있었으나 역시 두부보다 밀가루가 더 많았다. 양이 부족해 그 식당을 나와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 한 그릇을 시켜 조카와 나눠 먹었다. 조카가 닭고기 쌀국수를 시키라며 이모를 위로한다. 나는 쌀국수와 국물만이라도 먹으라며 나눠줬다. 한 그릇의 양이 제법 많아 둘이 먹어도 충분했고 맛있었다. 배가 좀 차는 기분이다.


저녁 먹고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마음이 전혀 불안하지 않고 숨쉬기도 편안해졌다.

오클랜드 시내 스카이시티와 성 패트릭성당, 알버트 공원의 하늘 (14:23, 14:2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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