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09)
‘부정(不定)’의 세계. 즉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고 옹호하지 않음, 이라고 시인 함성호는 이 시집을 평했다. ‘부정’이라 표현되는 강성은 시세계를 해석하기에 앞서 나는 내려놓는 일을 해야 했다. 일단 인물, 사건, 배경이 표상하는 의미를 끌어내고 현실과 맞대어보는 서사의 세계에서 나와야 했다. 시는 서사 문학이 아니다. 이 당연한 명제를 받아들이고 구체적 에피소드와 권계적 메시지를 찾고자 하는 집착을 버려야 했다.
그 후에도 한 번 더, 익숙한 상징의 시스템을 통한 해독을 포기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상징이다. 이 문학적 수사법은 시인이 택한 기표와 기의가 서로에게 가진 끈끈한 상호연관성으로부터 작동한다. 우리는 그 상호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가진 세계관을 통찰하는 열쇠라고 배웠다.
하지만 강성은은 그녀의 시집을 여는 시 「세헤라자데」에서 선언한다. 그녀가 지금부터 세헤라자데가 되어 들려줄 이야기는 우리가 움켜쥘 수 없는, 상징 체계 밖의 무엇이라고.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강성은,「세헤라자데」
천일야화의 주인공인 세헤라자데는 다들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녀는 처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다음날 그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샤리아르 왕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죽음을 유예한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청자의 귀를 잡아채는 이야기라면 분명 매혹적이고 아름다우며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야기여야 할테다. 이 익숙한 설화를 따라가다 보면 아까 강성은에게 접근하기 위해 내가 버려야 했던 두 가지 세계에 다시 발을 들이는 우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의 알맹이(인물·사건·배경) 그리고 상징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하지만 강성은은 이러한 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야기가 가진 알맹이가 아닌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자체만 우리에게 내놓는다. 게다가 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구멍이 숭숭 뚫려 우리 손 사이로 ‘모래처럼’,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알맹이, 즉 의미나 내용, 기의 따위가 아닌 그 사이 사이에 존재하는 틈과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이야기가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 이 세헤라자데는 어떻게 샤리아르 왕 그리고 우리를 매혹하려는 것일까? 알맹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주목해 그녀의 이야기를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동 시집에 수록된 「세헤라자데」, 「서커스 천막 안에서」,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등 몇 가지 시를 통해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진 몇 가지 특징들을 짚어보며 이 이야기가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해보자.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새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중략)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세헤라자데」)가 되어 그녀의 입이 아닌 관객인 줄만 알았던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세헤라자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강성은이 세헤라자데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보여진다. 그것은 서커스 천막 안에서 상연되는 공연(「서커스 천막 안에서」, “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서커스” 「잠의 형제」)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꾸는 꿈(“난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불」)이기도 하다. 시집을 읽어나가는 우리는 그녀가 써내려 간 시란 곧 ‘이야기―공연―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야기, 공연, 꿈의 공통점은 모두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환상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강성은의 시는 마치 이 환상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자의 악몽의 기록으로 읽힌다(이기성, 2009)’.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Inception)> 속 등장인물인 멜처럼 말이다. 멜은 남편 코브와 함께 꿈속의 꿈, 그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다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무의식의 공간인 림보에서 몇십 년을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꿈속의 삶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꿈속에서의 죽음을 통해 현실로 돌아온 이후에도 꿈속에서 겪었던 삶을 진짜라고 여기게 된다.
멜이 영원히 꿈속에 살기 위해 꿈과 현실을 구분하게 해주는 토템을 자신의 무의식 속 금고에 넣어 버리는 그녀만의 수단을 동원했듯이, 강성은 또한 독특한 방법을 통해 이야기에서 현실로 나가는 출구를 폐쇄하고 있다.
그 방법은 ‘재귀순환(recursion)’이라 불리는 반복의 메커니즘이다. 재귀(再歸)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거나 되돌아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재귀순환이란 스스로를 호출하여 끝없이 똑같은 식을 순환 즉, 반복하는 수식이자 함수다. 다만, 재귀순환함수는 언젠가 이 반복을 멈추게 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먼 옛날 우리가 배웠던 팩토리얼 식을 떠올려보자. n! = f(n) 이라고 쓰면 fact(n) = n x f(n-1) = n x (n-1) x f(n-2) = ... 하는 식으로 식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한 반복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n이 1과 같게 되면 f(n) 자리에 1을 넣고 식을 끝내는 탈출 조건을 덧붙인다. 하지만 강성은은 우리에게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나갈 수 있는 탈출 조건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한 전래동요 겸 자장가인 영국의 『머더구스의 라임(mother goose’s nursery rhyme)』의 형식을 차용한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를 보면 그녀가 사용하는 재귀순환적 논리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자줏빛 스카프가
내가 아름다운 두 팔로
그녀를 목 졸랐네, 라고 말했네
(중략)
누가 그녀를 토막내지?
가위가
그녀가 종이처럼 얇게 마른다면
내가 자르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말리지?
먼지가
그녀가 기억마저 잃었다면
내가 그녀를 감싸안고 까맣게 말리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기억을 가져가지?
그림자가
그녀가 쓴 노트들을 태운다면
내가 모든 기억을 데리고 달의 뒤편으로 가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노트들을 태우지?
태양이
그녀의 눈알들을 준다면
내가 노트들을 불살라버리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감은 눈꺼풀을 열고 눈알을 뽑지?
음악이
그녀의 목소리를 준다면
내가 그녀를 눈뜨게 하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깨워 노래 부르게 하지?
고통이
그녀가 지금도 나를 기억한다면
내가 그녀를 일으켜세워 노래 부르게 하지, 라고 말했네
그레텔 부인은 하루 온종일 노래 부르네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누가 내 사랑스런 그녀를 죽였나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시는 처음에는 단순히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 것처럼 보이다가 질문의 대답에 전제를 내달기 시작한다. 이 전제가 다음 연에서 질문이 되고, 이 질문에 대한 전제가 달리고, 이 전제가 또 다시 질문이 되고….
독특한 것은 그레텔 부인을 죽음과 소멸로 몰고 갔던 질문과 전제가 반복되면서 오히려 그녀를 부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을 기억하는 조건으로 일으켜 세워진 그레텔 부인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을 찾으며 노래 부르고, 그 노래는 다시 시의 첫 부분과 이어지며 영원히 반복된다. 결국 이 시에서 ‘그레텔’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래를 하지만 살아서 그 노래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계속되어야만 하는 지독한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녀는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 논리를 사용하며 “끝이 없는 이야기”(「세헤라자데」)를 하는 자기 자신과 그 이야기의 청자인 우리를 태연스럽게 죽음과 탄생(부활) 사이에 놓인 환상 속 시공간에 가둬버리고 있고 있다.
순환 논리는 비단 생명의 순환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태어났다 죽었다를 반복하며 천막 안에서만 살아 있어요”(「서커스 천막 안에서」)라고 말하는 그녀는 죽음이 곧 탄생으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난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라며 태연히 불 속으로 걸어들어”(「아름다운 불」)가버리는데, 그녀의 죽음과 부활을 지켜보는 관객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내(강성은)가 죽을 때까지 죽은”(「세헤라자데」) 사람이 된다.
죽음에서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레텔 부인이 그랬듯 노래를, 혹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세헤라자데」)라는 구절을 보자. 그렇다, 우리는 어느새 관객에서 상연자의 위치로 옮겨가 있는 것이다.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세헤라자데」) 입을 열고 있는 것이다.
순진하게 강성은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치고 앉아있다가 어느새 무대로 끌어올려진 우리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노래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를 무대로 끌어올린 강성은은 주로 「아라비안 나이트」, 『머더구스의 라임』, 「헨젤과 그레텔」, 「불구두와 바람샌들(우르줄라 뵐펠의 동화)」 등의 동화적 모티프를 빌려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들 아닌가? 샤리아르 왕이 선사하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매혹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어떻게 새로울 수 있을까?
잠시 예술과 문화에 대한 교양 수업을 하고 넘어가자. 이야기, 즉 예술 작품 속에는 중립적인 이미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미지는 제작자와 수용자가 가진 문화적 배경과 시청 맥락에 따라 부호화(encode)되고 해독(decode)된다. 이미지나 사물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부호화되며, 어떤 배경이나 맥락에 놓임으로써 또 한번 부호화 된다. 그리고 수용자가 소비하는 순간 이는 해독된다. 스튜어트 홀은 문화적 이미지와 예술 작품을 해독하는 관람자의 입장을 지배적-헤게모니적 해독, 교섭적 해독, 저항적 해독 등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이 중 저항적 해독은 우리에게 가장 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하면 기존의 이미지가 이미 가지고 있는 힘 있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여기서 전유(appropriation)라는 전략을 써볼 수 있겠다. 문화적 전유란 문화상품, 슬로건, 이미지, 패션 요소 등을 ‘빌려와서’ 그 의미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가령 사회에서 부정적인 단어로 통용되던 “Black”이라는 단어를 가져와 “Black is beautiful”이라는 인권운동의 슬로건을 만드는 것은 용어를 재전유해 부정적인 이미지로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로 읽어내는 저항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유의 전술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용어에 브리콜라주(bricolage)라는 것이 있다. 문자 그대로 ‘이미 존재하는 문화 요소들을 뜯어 맞추기, 조합 또는 땜질하기’를 뜻한다. 문화적 텍스트와의 관계에서 브리콜라주는 기성 언어의 파편들을 가져다가 콜라주하며 텍스트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다시 강성은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강성은의 경우 브리콜라주의 재료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들이다. 동화의 근원은 결국 원시시대의 설화(說話) 문학인데, 신화·전설·민담 등을 모두 포함하는 설화는 일반적으로 상징과 모티프라는 두 체계를 사용하며 작동한다. 사람들의 사고구조 깊숙이 자리잡은 원형적, 문화적 상징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고, 이야기 자체가 후대의 이야기에 쓰이는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의 상징·모티프 중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운명에 관한 것들이다. 고대 세계에서 실을 잣는 행위는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고대 사람들은 영혼을 붙잡는 그물을 만들기 위해 실을 잣는 과정을 운명에 대한 영적인 메타포로 생각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을 관장하는 세 명의 여신들(Μοῖραι)만 살펴봐도, 라케시스는 인간에게 할당된 생명의 실 길이를 재고 있으며, 클로토는 물렛가락에 달린 실패에서 생명의 실을 뽑아내며, 아트로포스는 생명줄을 잘라내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고대시대에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았던 운명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굴러간다. 마치 그것이 인간이 가진 유일한,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말이다. 운명과 맞서는 개인을 기다리는 것은 장엄한 파멸 뿐이다.
그런데 강성은은 동화의 모티프를 재료로 쓰면서도, 그리스 비극이 가진 운명론에 맞서 저항하는 일종의 ‘전유’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시에서도 시적 화자가 맞이할 운명의 실은 무한히 뽑혀나오고 있다. “물레가 돌아간다 투명한 실들이 흘러나온다 구불구불 빛이 흘러나온다”(「겨울밤」)과 같은 구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운명의 실을 무엇으로 전유하느냐다. 물레에서 돌아가던 실은 이윽고 “모두 그녀의 백발”(「겨울밤」)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머리카락은 잘려도 잘려도 계속해서 자라나는 신체 부위중 하나이다. 강성은은 머리카락 이미지에 대한 집착을 통해 손바닥 뒤집듯 죽음이 예견된 운명을 뒤집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여신에 의해 잘려나가 죽음을 언도 받아도 언제든 “상처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12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체가 죽어 사라져버려도, 그녀는 언제든 “긴 모자 속에 숨겨둔 내 머리털 하나로 다시 나를 만들”(「서커스 천막 안에서」)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실이 다 뽑아져 나와 이미 하나의 스웨터, 즉 그 색과 형태가 정해져 있는 삶으로 형상화된 후에도 그녀는 전유의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스웨터가 하나의 삶이자 운명이라면 그것을 풀어버리면, 풀어버려 나온 실로 새로운 스웨터를 떠버리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를 시도하고, “피를 흘리면서도 뜨개질을 멈추지 않”(「얼음나라 여자들」)는다.
이렇듯 그녀의 손에서 브리콜라주를 통한 운명에의 전유는 바삐 진행되고 있으며, 그를 통해 부활의 운명을 다시 선고받는 주체는 주로 ‘그레텔 부인’과 같은 (헨젤과 그레텔의 그 여동생이 맞다) 여성들이다. 시집을 처음 여는 순간부터 이미 샤리아르 왕에게 목숨을 저당잡혀 있던 여성화자(「세헤라자데」)는 남편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하고(「서커스 천막 안에서」), 자줏빛 스카프와 같은 사물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하며(「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때로는 바람이 몰아쳐 내장을 쏟아내며 죽기도(「새벽 두시의 변기」)하며 폭력이 만연한 세계 속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희생양으로서 존재하는데, 바로 이 죽음에로의 희생적 운명을 그녀는 이야기를 통한 반복적인 부활로 뒤집고 있는 것이다.
“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서커스”(「잠의 형제」)의 무대에 서서 죽음으로써 신의 눈을 즐겁게 하던 그녀는 죽음에서 부활로, 부활에서 죽음으로 바삐 이행하고 있으며 그 무대를 지켜보던 우리에게 어느새 이 무대에 설 바톤을 넘기고 있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강성은의 세계를 탐구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를 지켜보던 우리에게 무대를 넘겨줌으로서 잠시 타인의 죽음을 상연했을 뿐 그녀는 여전히 서커스 천막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로지 이야기를 통해서만 죽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할 수 있고 그것은 끝없이 뱅글뱅글 반복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결코 운명의 위대한 극복이나 초월의 서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교훈은 없을지언정, 난해한 시어가 파편처럼 흩뿌려진 그녀의 세계를 읽어보며 학생들은 익숙한 유기성과 총체성, 형식과 의미의 합일이 있는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까닭모를 ‘불편함’을 체험해 볼 수 있겠다. 실상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사회가 항상 품고 있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 나도 모를 불편함은 느낄지언정 그 모든 것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고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세계는 아니지 않았는가. 문학의 세계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상징과 서사를 찾아내던 습관-어쩌면 매우 권위 복무적인-을 모두 버리고 무(無)에서 시와 만나는 경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폭력성을 더 생생히 느끼는 경험일지 모른다.
강성은의 시세계에 짙게 깔린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노래 소리는 결국 구조적 폭력에 대해 체념과 저항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불온한 타자가 택한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고 죽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 노래하고”(「계면」) 있는 강성은의 시적 화자를 끈질기게 따라가며 이해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타자의 세계와 감응하고 응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단행본
강성은(2009),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마리타 스터르큰, 리사 카트라이트(2006), 『영상문화의 이해』, 윤태진, 허현주, 문경원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C.S.에번스, 김영미 역(2019), 『브라이어 로즈』, 책보요여.
논문 및 평론
이기성(2009), 「동화와 멜랑콜리, 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 문학과사회, 22(3), 521-524쪽.
이찬(2009), 「[서평④] ‘동화적 상상력’의 알레고리, 새로운 ‘그림자-몸’의 탄생」, 계간 시작 8(4), 234-244쪽.
임지훈(2020), 「악몽을 거쳐야 태어나는 것들 –강성은의 시」, 서울신문, 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