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Gap Year Story

갭이어의 시작

슬럼프도 같이 시작

by woomit

Life is a Matter of Direction, Not of Speed- Emanuel Pastreich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근데 내 방향이 무엇인가가 의심스러워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한다.

특히 나에게는 주기별로 일하기 힘든 시간이 찾아오곤 했는데 예외 없이 이런 시간이 왔다.

자율성은 하나도 주어지지 않으면서도 창의력을 숫자로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환경을 만나

한참 기울어진 게임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계속 버티다 보니 정신적, 신체적으로 좀 버겁기는 했다.


남편의 공부가 끝나고 운 좋게도 좋은 직장을 구해

자의 반 타의 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려고 할 즈음,

여러 가지 악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다른 부서와의 갈등이 점점 극심해졌고 스트레스 증가로 인한 평소의 이갈이가

더욱 심해지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심한 치통과 두통이 평상시에도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병원에서도 마우스피스 외에는 딱히 뭐를 제시해 주지도 않는 데다

바꾼 지 3개월도 안된 마우스피스도 으스러지는 지경이어서 솔직히 괴로웠다.

게다가 한국에 있는 가족이 갑자기 아프게 되어서 응급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받았다.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한 기분에 더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던 찰나

평소에 고민했던 문제를 한국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계획이 생겨서

그래 한 6개월 정도만 한국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려고 했던 일도 해결하고 일에서 조금 거리를 두면서

앞으로 같이 보낼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는 한국의 가족들과 알찬 시간을 계획했다.




한국에서의 6개월.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리해야만 했던 일을 정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며

내가 왜 한국을 떠나 생활하고 싶어 했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한국 사회가 주는 여러 종류의 압박감과 비교문화.

뭐가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는 일이 많을까?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다 똑같이 해야 한다고 하는지

남의 얼굴에 몸에 옷에 가방에 참견과 뒷말은 왜 당연한 거며

겉으로 드러난 물질적인 것들로 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님 그러면 벌 받아요 소리가 절로 나는 행동들이 이 사회에서는 영리하고 똑똑한 거란다.

결론은 너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는 중요치 않지만

내 체면과 감정에는 진심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건데

난 그냥 잘 모르겠고 그런 거 사실 그냥 계속 모르고 싶다.


두 번째 이유는 가족.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 돌연변이 같다고 느꼈었는데

요새는 그 이유에 대해 좀 더 명확해진 거 같긴 하다.

누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닌 내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와 결이 많이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가까이 지내면 서로에게 상처 줄 확률이 높아지니

먼 거리를 핑계 삼아 평소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자주 통화하고 가끔 만나는 게

확실히 우리 사이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세 번째 이유는 역시나 직업.

지금 내 나이에 한국에서 디자인 팀장을 못 달면 미래가 없을 거라는 건 한국을 떠난 15년 전에 이미 예상했던 바이다. 한때는 팀장이 아닌 디자이너로 은퇴했던 독일의 한 할아버지가 내 롤모델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계속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상태이다. 새로 뭘 시작해볼까 싶어 주위를 보니 이곳 한국에서의 자영업은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내 나이대의 결론이다. 난 벌써 독일에서 두 번 이상 자영업-프리랜서에 도전해 봤고 쉽지 않다는 걸 아는 터라 다음에 내가 뭘 또 자영업의 형태로 도전하게 된다면 큰돈을 들이거나 빚을 내서 시작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잘 실패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초기에 세팅하는 게 내 목적이다.


문제는 그걸 내가 진짜 하고 싶어 하느냐인 거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그렇게 크게 배팅을 하는 게 옳은 걸까?

디자인도 10년 가까이해 보니 회의감이 드는데 다른 일이라고 안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자

사실 겁부터 난다.




아... 이제 겨우 불혹인데 이게 뭐람...

이 늦은 나이에 나는 또 20대에 그랬던 것처럼 방황을 한다.

진짜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울감에서 빠져나오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