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닌의 우주

너와 나의 우주

by 우물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부인을, 여자가 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쿤데라>

<하얀 고양이, 피에르보나르>

쿤데라는 테레자가 카레닌의 '개의 우주'를 수락했다고 썼지만, 어쩌면 그 반대의 진실이 더 거대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테레자의 그 위태롭고 파편화된 우주를 온전히 지탱해 낸 것은, 말 없는 카레닌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시간은 직선으로 내달리며 끊임없이 '다른 것'과 '새로운 것'을 갈구한다.
어제와 같은 크루아상이 지겨워지는 순간, 우리는 상대의 우주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자신의 욕망을 밀어 넣으려 한다.
그러나 카레닌에게 테레자는 매일 아침 반복되는 태양과 같았을 것이다.
그녀가 슬픔에 잠겨 있든, 질투로 몸부림치든, 카레닌은 그 우주가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이 그저 그 궤도 안에 머물기를 선택했다.
조건 없는 수용이란, 상대의 중력에 나를 온전히 맡기기로 결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우주에 안착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그 우주를 나의 방식대로 개조하고 싶은 오만한 정복욕을 품고 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별들을 재배치하고, 그곳의 대기 성분을 바꾸려 들 때, 그토록 갈망하던 안식은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봄으로 넘어가던 산복도로 위 밤공기 속에서 바라보았던 꼬랑이의 우주가 생각난다. <모티>의 위스키 마스터가 반려고양이 꼬랑이를 품에 안고 느꼈던 그 평온함은, 아마도 '나'라는 존재를 고치려 들지 않는 존재로부터 오는 구원이었을 것이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과연 그러한 받아들임을 누군가로부터 경험했던 적이 있을까.
그리고 나는 과연 누군가의 우주에 발을 들일 때, 그곳의 고유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적이 있었나.
나의 잣대로 그녀의 우주를 재단하고, 나의 편안함을 위해 상대의 궤도를 수정하려 들지는 않았을까.
내가 나의 우주를 바꿀 수 없듯 그녀 역시 그녀의 우주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우주를 말없이 품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우주에 귀화하는 일이다.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 그곳의 기후를 견디며, 그 우주가 지닌 은밀한 성향을 침범하지 않은 채 함께 흘러가는 것.
테레자의 곁에서 묵묵히 크루아상을 물고 있던 카레닌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우주를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세계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직선적인 시간 속에서도 반복되는 행복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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