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

by 우물

아무리 기억을 풀어헤쳐 한 땀 한 땀 더듬어보아도, 영화 <13일의 금요일>을 단 한 번이라도 온전하게 관람한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식의 한 구석에는 그 잔혹한 서사의 파편들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깊게 각인되어 있다. 어린 시절 친구의 집이었을까, 사촌누나의 집이었을까.
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봤던 것 같기도 한데 그 장면의 파편들이 기억 속에 있는 찜찜함.
분명한 것은 나는 공포 영화를 빌려 보지 않았기에 도대체 내게 잔존하는 기억의 조각이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기억 속 차 안에서 밀어를 나누던 연인들의 평화가 무너지는 순간, 정적을 깨고 나타난 하얀 하키 가면을 쓴 덩치 큰 사내. 그리고 그의 상징인 차가운 도끼날이 선사하는 처참한 죽음. 수영장인지 연못인지 알 수 없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제이슨이 끝없이 부활해 주인공의 뒤를 쫓던 장면들은, 어린 시절의 나를 압도하던 거대한 공포의 형상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토록 느릿느릿, 어쩌면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제이슨의 발걸음을 그들은 왜 피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성보다 감각이 앞섰던 시절, 제이슨의 느린 걸음은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발소리였고, 내 머릿속 조각난 공포는 그 어떤 논리보다 선명한 공포의 실체가 되었다.


달력의 톱니가 맞물려 우연히 13일의 금요일이 되는 날이면 아이들 사이에서는 어김없이 불길한 징조에 대한 이야기가 유령처럼 떠돌았다.
서구적 금기에서 기원한 사회적 배경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날은 단지 제이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가면 뒤에 숨은 '죽음의 상징'이 현실로 걸어 나올지도 모른다는 짜릿한 가능성의 날이었다.
어린 시절이란 아마도 세상의 온갖 괴담을 연료 삼아 넘쳐나는 상상력을 태워버리는 시기가 아닐까. 조악한 가면에 투영된 죽음이라는 낯선 주제는 어린 우리에게 두려움인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공포의 트렌드가 제이슨과 프레디를 지나 스크림으로 넘어가던 무렵, 나는 어느덧 공포라는 자극에 무뎌진 어른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미지의 살인마는 나를 지배하지 못했다.

공포를 지탱하는 원초적 뿌리는 결국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유도 모른 채, 정체도 모르는 대상에게 사냥당할지도 모른다는 그 감각은 인간을 끝없이 자극하고 뒤흔든다. 어쩌면 수렵 채집의 시간 속에서 등뒤에 도사리고 있던 불분명한 공포의 그림자를 유전자가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포는 그런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을 먹이로 몸집을 불린다.
하지만, 그 두려움 보다 더 앞서는 것이 바로 ‘호기심’이다.
분명히 두렵지만 인간은 그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이게 마련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인류의 오래된 서사 속에서 호기심의 끝은 늘 파멸이었다.
판도라의 상자부터 이카루스의 날개까지, 사회는 늘 개인의 호기심을 경계하고 자제시키려 애써왔다.
비록 그 끝이 파멸일지라도, 금기된 영역 너머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숭고한 본능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에 닿을지언정 진실에 닿으려 했던 그 무모함이 인간의 역사를 지금까지 써 내려온 것이겠지.

오늘, 다시 13일의 금요일이 찾아왔다.
이제는 아무리 늦은 밤 홀로 거리를 걸어도 제이슨의 도끼날을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의 어린 세대는 13일의 금요일을 알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금요일을 굳이 찝찝하고 긴장감 넘치는 공포의 무대로 탈바꿈시켰던, 그 치열했던 어린 시절의 상상력이 몹시도 그리운 밤이다.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차가운 도시의 밤보다, 하키 가면을 쓴 괴물이 모퉁이 너머에 있을지 모른다고 믿었던 그 서늘한 설렘이 오늘따라 유독 따뜻하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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