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유년의 꿈

by 우물


‘어린 시절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꿈을 꾸시겠어요.’
라는 문장을 읽었다.

이 문장을 되뇌다 문득 생각이 멈춘다.
‘큰 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계에 도전하는 양의 차이일까, 아니면 성취의 무게일까.
건물주가 꿈이라는 초등학생의 웃픈 대답을 떠올려 본다.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도달해 버린 그 지점이 누군가에겐 평생의 목적지가 되는 풍경.

어쩌면 큰 꿈이란, 나의 상상력에 어떤 울타리도 두지 않았을 때 비로소 터져 나오는 가장 나다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의 유년은 회색빛 콘크리트 골목길 위에 있었다.
먼지가 앉을 새도 없이 쏘다니던 그곳에서 우리는 매일 로봇 조종사가 되었다.
태권 V, 마징가 Z, 메칸더 V...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되고 싶었다.
유선방송조차 나오지 않던 우리 집 형편에 나는 마징가 Z를 본 적이 없었지만, 친구들의 목소리가 빚어낸 묘사만으로도 내 머릿속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인한 로봇이 세워졌다.

“마징가 비이이임—!”

가슴을 활짝 펴고 짐짓 비장한 포즈를 취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 걸맞은 액션으로 화답했다.
훗날 매체를 통해 접한 진짜 마징가 Z가 어린 시절 우리가 상상으로 그려냈던 쇳덩이보다 훨씬 왜소해 보여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내 몫이었던 태권 V가 실은 마징가 Z를 표절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마치 내 소중한 추억의 한 조각이 마르게 시들어버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골목길에서 먼지를 마시며 로봇 파일럿을 꿈꾸던 순간만큼은 세상 그 무엇보다 순수하고 거대했다.

<노먼 록웰>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현실’이라는 이름의 상자를 선물 받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자 속에 꿈을 구겨 넣기 위해 부지런히 가위질을 시작한다.
로봇 파일럿이었던 꿈은 과학자로, 의사로, 교수로... 그러다 어느샌가 ‘안정된 직장’이라는 매끈한 조각으로 잘려 나간다.
상자를 넓히는 수고로움 대신, 꿈을 제단 하여 상자에 맞추는 안일함에 타협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속삭인다.
“너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하지만 그 다정한 응원 뒤엔 차가운 괄호가 숨겨져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지금은).’
꿈을 꾸라던 선생님의 격려가 “이 점수로 어느 대학에 갈 수 있겠니”라는 질문으로 치환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번 꿈의 가장자리를 잘라내며 현실의 상자 안으로 몸을 움츠린다.

다시 그 질문을 돌아본다.
‘어린 시절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꿈을 꾸시겠어요.’

공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마징가, 태권 V, 건담과 같은 거대한 로봇을 움직일 동력원을 내 생애 안에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내 꿈을 현실의 상자에 맞춰 가위질하지 않기로 했다.
그 꿈은 여전히 내 상상력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기에 나는 다시금 로봇 파일럿이라고 말한다.
로또 1등, 건물주, 비트코인 등등을 말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니까.

어른은 아이의 무구한 상상력을 그대로 되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그 골목길에서 가슴을 펴고 외치던 그 순수한 에너지를 지금의 꿈에 이식해보려 한다.
실현 가능성이라는 잣대를 치우고 나면, 꿈은 다시금 우주만큼 커질 수 있으니까.

(어린 시절로 돌아가 제일 되고 싶은 건 NBA농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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