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아섬의 관습에 반대하며

by 우물

몽테뉴의 에세 제2권 3장에 수록된 <케아섬의 관습에 관하여>에서 언급되는 관습은 '국가가 허락하는 명예로운 자결'이다.
케아섬에는 '독미나리(hemlock)'로 만든 독약을 관청에서 보관하는 관습이 있는데, 만약 어떤 시민이 삶을 지속하기 어려운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 사유를 행정관들에게 제출하여 죽음을 허가받을 수가 있다.
이 관습의 독특한 점은 자결이 '도피'나 '죄'가 아니라, 공동체의 승인을 받은 합리적인 선택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허용된 죽음은 명예로운가.

때때로 나의 현재가 가파른 절벽 끝에 서있는 듯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등 뒤에서 밀려오는 막막한 어둠이 보기 싫어, 눈앞에 펼쳐진 눈부시게 푸른 허무가 훨씬 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생(生)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고요한 무(無)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은 그 아찔한 충동은 때로 ‘권리’나 ‘존엄’이라는 근사한 수식어를 빌려 우리를 흔든다.

오래전 케아섬의 사람들은 그 유혹에 질서를 부여했다.
몽테뉴가 기록한 그 섬의 관습은 기이하리만큼 평온하다.
관청의 허락을 얻어 국가가 정성껏 마련한 독미나리 즙을 마시는 행위,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에 비추어 그들이 설계한 가장 세련된 퇴장이었을 것이다.
노쇠함과 질병이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사람들은 ‘이성적인 완성’을 보았을지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죽음과 존엄에 대한 끝없는 고민을 하기 때문에 ‘케아섬의 관습’은 어쩌면 너무나 합리적인 사회적 장치로 보인다.

빈센트 반 고흐, 슬퍼하는 노인

하지만 나는 그 세련된 마침표 뒤에 숨은, ‘비겁함’의 언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삶이 내던지는 불확실성이라는 공포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치는 행동이다.
죽음이라는 방패 뒤로 숨어버리는 행위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수많은 ‘나’의 가능성을 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산 정상에 올려놓기 무섭게 굴러 떨어지는 그 무의미한 바위.
그 형벌의 잔혹함은 바위의 무게가 아니라, 그 일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무의미’에 있다.
그러나 카뮈는 말한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고통보다, 다시 바닥을 향해 걸어 내려오는 그 적막한 시간이 시지프스를 위대하게 만든다고.

그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부조리를 끝내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손쉬운 구원을 거부하고, 텅 빈 손으로 다시 바위를 잡는다.
자살은 세계가 던진 부조리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당신이 이겼소”라고 고백하는 투항이다.
반면,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세계를 향한 가장 지독한 복수다.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그 삶을 껴안고 버티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신에게, 그리고 운명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티치아노, 시지프스


니체의 ‘영원회귀’를 생각해 본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삶이 지독한 슬픔과 지루한 일상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니체는 우리에게 묻는다.
버려지는 경험이란 없다. 살면서 흘린 이름 없는 눈물도, 오후의 나른한 권태도, 가슴을 후벼 파는 상처도, 만약 그것이 영원히 반복될 우주의 한 조각이라면 그 자체로 신성한 가치를 지닌다.

삶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세수를 하며, 어제와 다름없는 길을 걷고, 다시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다.
하지만 니체의 말처럼, 이 반복되는 일상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수용할 때, 우리의 평범한 하루는 비로소 거대한 패턴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이 된다.
오늘 내가 마신 달콤한 커피 한 잔이, 너와 함께 나누었던 쓴 소주 한잔이, 누군가에게 건넨 짧은 위로가 영원 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경험은 영혼에 새겨진 결이다.
옹이가 없는 나무는 비바람을 견딜 수 없듯, 고통의 경험이 없는 영혼은 단단해질 수 없다.

비겁해지지 말자.
품위 있는 자결이라는 허울 좋은 환상에 속지 말자.
진정한 용기는 피 흘리는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라는 전장에서 묵묵히 내일의 해를 기다리는 인내에 있다.
삶이 비극으로 흐를 때 그 비극의 목격자가 되고, 삶이 무채색일 때 그 고요한 정적의 청취자가 되는 것. 그저 ‘살아남아 관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세계의 승리자라는 증거다.

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삶이 누군가에게 들려줄 영웅담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땀방울이 햇살에 비쳐 잠깐 반짝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것은 경험이고, 그 경험들이 모여 ‘나와 너’라는 유일무이한 우주를 만든다.
니체의 '아모르파티'는 결코 화려한 축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까지도 사랑하겠다는 눈물겨운 다짐이며,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대한 가장 뜨거운 응답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 위에 남아, 조명이 꺼진 뒤의 정적까지도
온몸으로 느끼며 전율하는 저항의 배우가 되자.
죽음은 부조리를 끝내주지 않는다.
오직 살아있음만이 부조리를 증명하고,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다.
비겁하게 문을 닫고 나가는 대신, 열려 있는 창밖으로 밀려오는 시린 바람을 끝까지 맞이하리.
삶이라는 이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형벌을 끝까지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생에 바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예의이자 진정한 저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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