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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순례길의 프랑스구간
르퓌순례길을 걷다 2

by 이재형

2 : 르퓌(le Puy)에서 생프리바달리에(Saint-Privat-d’Allier)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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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퓌 순례길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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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르퓌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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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퓌에서 산티아고까지 1,522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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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진. 순례자를 맞는 야고보 성인)


이제 막 르퓌를 떠난 순례자들. 저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프랑스의 마리아상이다..JPG

이제 막 르퓌를 떠난 순례자들. 저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프랑스의 마리아상이다.



이제 순례자는 르퓌를 떠나 블레이 지방의 화산지대와 마르즈리드 지방의 화강암질 산괴, 오브락 고원, 로트 지방의 계곡, 케르시 지방의 석회질 고원, 가스코뉴 지방의 작은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피레네 산맥을 멀리 바라보고 걸으며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할 것이다.


나무에 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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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첫날, 르퓌를 출발하여 숙소가 있는 생프리바달리에Saint-Privat-d’Allier까지 걷다 보면 돌담이 지천이어서 영락없이 제주도에 와 있는 듯하다. 모르타르 없이 올려놓은 돌들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큰 돌 작은 돌, 못난 돌 잘난 돌, 둥근 돌 네모진 돌이 차별 없이 골고루 섞여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담을 쌓아올렸으니, 꼭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 같다.

골고루 섞여 있는 돌의 세계처럼, 순례자의 세계에도 차별과 배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중요하지 않고, 가난한지 부자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순례자의 세계는 완전히 평등한 세계다.

따사로운 돌담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초록색 도마뱀이 나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다.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는 시가 저절로 입속에 맴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돌담과 생울타리, 그리고 줄지어 늘어선 물푸레나무, 이 세 가지가 블레이 지방의 농촌 풍경을 이룬다. 물푸레나무는 농촌생활을 상징하는 나무로 온갖 종류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서 가축들에게 아주 좋은 먹이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초원에 풀이 드물어지면 농민들은 이 나무의 가지치기를 해서 잎이 달린 가지는 소나 양에게 던져준다. 가축들은 가지와 껍질, 잎사귀 등 이 나무의 모든 것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어치운다. 어떤 농민들은 가지를 말려서 겨울 내내 가축들에게 사료로 제공한다. 물푸레나무는 자기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 데 대해 앙심을 품지 않고 그 다음 해에 다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낸다. 이 나무는 땔감으로도 쓰고 가구와 연장을 만들기도 한다. 물푸레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나무인 것이다. “한 잎의 여자”처럼...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 잎의 여자(오규원)


이 블레이 지역은 매우 오래 전에 화산이 폭발했던 곳이라서 땅이 매우 기름지고, 그 덕분에 아주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비옥한 토양에서는 AOC(원산지 명칭 통제) 라벨을 받은 르퓌 렌즈콩이 생산되고, 고지대에서는 보리나 호밀 같은 낟알식물과 사료용 목초를 번갈아가며 재배한다. 이곳의 겨울은 혹독할 정도로 춥기 때문에 농가마다 매서운 북풍한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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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8년 9월에 떠난 르퓌길 순례 때 책 한 권을 비닐로 잘 싸서 배낭에 넣어가지고 갔다. 독일의 산림경영지도원인 페터 볼레벤이 쓴 <나무들의 비밀스러운 삶La Vie secrète des arbres>(한국에서는 “나무 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한국어판을 구할 수 없어서 프랑스어 판으로 읽었다)이라는 책이었다. 르퓌에서 생장피에드포르까지 730킬로에 이르는 르퓌 순례길을 걷다보면 자동차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주로 나무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는 오솔길이나 산길, 숲길을 걷기 때문이다.

순례를 떠나기 전 잠깐 읽은 이 책의 내용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나는 걷는 동안 이 책을 나의 동반자로 삼기로 결심했다.

나무의 세계에 익숙한 독자조차도 이 책이 제공하는 새로운 관점, 혹은 쇄신된 관점에 놀라게 된다. 균근 버섯 원사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나무들의 소통 언어, 나무들의 연대 혹은 개인주의, 나무들의 느리거나 빠른 성장, 각자의 게놈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특징, 숲 토양의 왕성한 생명력,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 수지류 수목과 활엽낙엽수, 프런티어 나무와 그 후계자 나무들 간의 역학관계, 빙하시대 이후로 끊임없이 이루어진 수종(樹種)들의 이동, 기후온난화의 전망, 그리고 태풍과 회오리바람, 추위, 눈, 가뭄이 나무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

나무들은 사회적 존재다. 배우고 기억하고 서로 돕는다. 나무들의 사회연결망이라고 할 수 있는 균성(菌性) 소통 시스템을 이용, 만일 위험이 닥친다 싶으면 미세신호(microsignal)를 보내 그걸 방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무들은 또 서로를 배려하여 햇볕이 다른 나무를 비추도록 가지의 방향을 잡아준다.
숲에는 연인들, 부모들이 자라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아이들, 서로 의지하는 이웃들, 대담한 선구자들이 산다. 그들은 소통하고 영양물을 나눈다. 이렇게 해서 숲은 수만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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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는 <느림의 찬양>라는 장을 흥미롭게 읽었다.

“나는 나무가 그렇게 느리게 자라는 줄은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다. 내 관리 구역에는 키가 1~2미터 정도 되는 어린 너도밤나무들이 있다. 예전에 나는 그 나무가 아무리 많아도 열 살을 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가지의 나이로 미루어 계산해 본 결과 그 어린 나무들의 나이는 최소 여든 살, 혹은 그 이상도 될 것임이 분명했다. [...]

어린 나무들은 어서 빨리 자라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마음만 먹으면 한 철에 50센티는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엄마 나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 나무는 거대한 수관(樹冠, 수관이란 나무의 맨 위에 있는 가지들을 말한다)으로 어린 자식들을 뒤덮고, 이 수관은 옆에 있는 어른 나무들의 수관과 함께 숲 위에 두꺼운 지붕을 씌운다. 그렇게 하면 햇빛의 겨우 3퍼센트만 지면까지, 즉 아기 나무들의 잎까지 새어 들어온다. 3퍼센트의 햇빛이면 겨우 목숨만 간신히 부지할 정도의 광합성만 할 수 있다. 키나 몸통을 키우는 건 꿈도 못 꾼다. 에너지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엄한 교육에도 반항하겠는가? 교육이라고?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린 나무들의 행복이 유일한 목적인 교육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삼림 관리인들이 수세기 전부터 이용해온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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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교육적 수단은 빛의 제한이다. 그런데 왜 이런 제한이 필요한 것일까? 부모라면 자식이 얼른 자라 독립하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가? 아니다. 부모 나무들은 안 그런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과학이 그들의 입장을 지지해주고 있다. 어릴 때의 느린 성장이야말로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나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산다. 현대의 임업은 나무의 나이가 80~120살 정도면 베어 쓴다. 그 정도면 베어 쓰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적 환경에서라면 그 나이 정도의 나무는 사람 키에 연필 정도의 두께밖에 안 된다. 워낙 느리게 자라기 때문에 나무의 세포는 매우 작고 공기 함량도 아주 적다. 그래서 탄성이 뛰어나 폭풍이 불어도 잘 부러지지 않는다. [...]
나무들의 인내는 20여 년 뒤에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오른다. 그것은 엄마 나무의 이웃들이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비어 있는 공간 속으로 가지를 뻗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것이 나무의 속도다.”

이 느림의 미학이야말로 천천히 걸으며 많은 것을 보는 순례의 미학과 맞닿는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쓴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에 따르면,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며, 순례는 그 같은 삶의 방식을 길 위에서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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