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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순례길의 프랑스구간 르퓌순례길을 걷다 3

생프리바달리에에서 소그까지

by 이재형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적군에게 둘러싸인 로슈귀드 예배당

이른 시간, 로슈귀드 숙소에서 잠을 깬 나는 새벽안개가 저 아래 알리에 강에서 올라오더니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생자크 예배당을 둘러싸는 광경을 보았다. 구름 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예배당은 꼭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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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김승옥, <무진기행>)


로슈귀드의 생자크 예배당 3.JPG

나는 안개에 잠긴 그 몽환적인 풍경 속을 걸어 알리에 강가에 자리 잡은 마을 모니스트롤달리에로 천천히 내려갔다. 여행이 여행자에게 주는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진의 안개 속에서만 숨겨져 있는 욕망을 발산하던 주인공이 생각나서였을까, 짙은 안개 속에서 나른한 몽상에 잠겨 있던 나는 <모니스트롤달리에>라는 팻말이 보이는 순간 문득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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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펠 다리



주민 수가 2백 여 명밖에 안 되는 이 마을로 가려면 그다지 길지 않은 철교 하나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 이름이 바로 에펠(Eiffel) 다리다. 맞다, 파리의 에펠탑을 건설한 그 귀스타브 에펠 씨가 세운 다리. 에펠은 전 세계 곳곳에 수많은 건축물을 설계하고 건설했지만, 그의 이름을 국내외에 알린 것은 1877년에 건설한 포르투갈의 마리아 피아 다리(이 다리는 그때까지 건설된 다리 중에서 가장 가볍고 돈이 가장 덜 들어가고 가장 혁신적인 다리였다)이고,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것은 프랑스의 가라비 고가철도(1884년 완공. 122미터 높이의 허공에 떠 있는 이 공중 철도는 철판을 받치고 있는 길이 165미터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길이는 564.69미터다. 무게가 3,249톤에 이르는 이 다리는 모니스트롤달리에에서 서쪽으로 50여 킬로 떨어진 트뤼에르 협곡을 날렵하게 건너뛴다. 이 붉은색 철교야말로 험준한 산과 깊은 계곡 등 적대적인 자연을 극복한 예술작품이다)이며,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것은 파리의 에펠탑(188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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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s://www.instagram.com/___celi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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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펠탑 CC BY-SA 3.0


그럼 에펠탑은 언제 왜 세워진 것일까?

우선 두 남자가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은 에펠이 아니다. 이들은 에펠 회사를 위해 일하는 기술자였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혁명 백 주년이 되는 해에 파리에서 열려 한층 더 의미가 깊었던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전시관 출입문으로 쓰일 거대한 기념물 설계를 공모했다. 앞서 말한 기술자, 모리스 쾨클랭과 에밀 누귀에르는 설계안 초안을 에펠에게 보여주었고, 그걸 본 에펠은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초안이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 가자 에펠은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에펠탑 특허권을 5억 원에 사들였고, 이 혁신적인 설계안은 공모 심사에서 107개의 다른 설계안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이 107개의 설계안 중에는 프랑스 혁명 백 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단두대 모양의 탑을 세우자는 안도 있었고, 물뿌리개 모양의 탑을 건설해서 파리에 가뭄이 들면 물을 뿌리자는 안도 있었다.

에펠은 250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에펠탑이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자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들고 일어났다. 모파상은 속이 움푹 들어간 촛대, 베를렌은 해골처럼 생긴 망루라고 비꼬았고, 위스망은 깔때기처럼 생긴 석쇠 같다고 코웃음쳤다. 심지어는 높이가 69미터에 불과한 노트르담 성당을 300미터 높이에서 내려다본다는 이유로 “반교권적”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몇 달 동안 예술가들과 언론인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에펠탑 건설을 반대하고 나섰지만, 이 탑이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끄는 바람에 결국 이들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300미터 높이(지금은 324미터)의 이 철골구조물은 공사 시작 2년 2개월 5일 만인 1889년 3월 31일에 완공되었고, 이후로 에펠탑은 엄청난 높이와 아무리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실루엣으로 파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만국박람회가 개막되기 전에 에펠은 그동안 애써준 노동자들을 에펠탑으로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고, 이때 에펠은 1,710개의 계단을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프랑스 국기를 꽂았다.

만국박람회용 임시 기념물이어서 이 철부인(鐵婦人, la Dame de Fer)은 20년 후인 1909년에 철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04년 에펠탑에 라디오 송신장치가 설치되어 라디오 송신 기술이 크게 발달하자 1909년 결국 에펠탑을 철거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이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에펠탑에 프랑스 군의 무선전신 센터가 설치되어 프랑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1935년에는 에펠탑 꼭대기에 텔레비전 송신탑이 설치되었고, 지금은 파리 지역에 방영되는 41개 채널과 32개의 라디오 방송국 안테나 120개가 설치되어 있다.

300미터가 넘는 이 탑은 전 세계의 수많은 모험가들을 유혹했다. 1912년에는 라이켈트라는 프랑스 사람이 직접 만든 날개를 달고 탑 2층에서 뛰어내리다가 꽁꽁 언 땅바닥에 30센티 깊이의 구멍을 남기고 사망했는데, 부검을 해보니 사인이 땅에 닿기도 전에 심장마비에 걸린 것이었다. 1926년에는 레옹 콜로라는 프랑스군 장교가 비행기를 타고 탑의 1층 아치를 지나가다가 라디오 송신탑과 충돌하여 사망했다. 또 1928년에는 마르셀 가에라는 보석상이 낙하산을 매고 80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렸으나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 바람에 그대로 땅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신문기자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1905년에는 포레스티에라는 우유 배달인이 한 신문사가 주최한 “계단 빨리 내려가기 선수권 대회”에서 729개의 계단을 3분 12초 만에 뛰어 내려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중에서 단연 압권은 “에펠탑을 팔아넘긴 남자” 사건. 1925년 체코 출신의 빅토르 루스티그라는 사기꾼이 에펠탑을 한 고철업자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에펠탑을 담당하는 정부 고위관료인데 탑을 더 이상 관리하기가 힘들어서 곧 해체할 예정이라고 한 고철업자를 속였다.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은 이 고철업자는 에펠탑이 해체되면 고철을 넘겨받기로 하고 그에게 선금을 지불했다. 물론 이 사기꾼은 돈을 들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은 소설로도 쓰여지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아흔한 살까지 살았던 에펠은 “나는 죽고 나서 에펠탑을 질투하게 될 거야. 나보다 더 유명해질 테니까”라고 말하곤 했고, 매년 에펠탑에 오르는 사람들이 천만 명에 가까운 걸 보면 그의 말은 옳았다.


저 아래로 보이는 것이 모니스트롤달리에 마을이다.JPG

사진. 저 아래로 보이는 것이 모니스트롤달리에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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