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락은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2만5천 헥타르의 고원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현무암으로 덮여 있는 화강암질 기반이다. 이곳에는 경작지가 없다. 오직 풀과 바위만 끝없이 펼쳐지다가 구불거리는 계곡과 소나무 숲, 밤나무 숲, 이탄지만 이따금 나타날 뿐이다. 이곳에서는 용담과 콜히쿰이 자란다. 그리고 살을 에듯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 순례자의 뼛속까지 파고든다.
이곳의 순례길은, 날 좋은 봄 가을철에는 목가적인 산책이 될 수도 있지만 겨울에는 끔찍한 시련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 지역에는 추위와 눈, 폭풍우가 빈번하게 찾아온다. 몇몇 작은 마을과 양치는 목동의 땅딸막한 오두막집 몇 곳만이 이 사막처럼 황량하고 웅대한 풍경 속에 이따금 등장한다. 그리고 목동들은 이 오두막집에서 은자처럼 살며 치즈를 만든다.
이런 자연환경은 지금도 적대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니 혹독한 기후에 강도들이 출몰하고 군대가 노략질을 일삼던 옛날에는 어떠했겠는가?
951년에 검은 성모 마리아 상이 모셔져 있는 도시의 주교였던 고데칼크가 처음 연 르퓌 순례길은 바로 이 오브락 고원을 지나간다.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순례자들의 숫자가 매우 많았지만, 안전은 보장되지 않았다. 12세기에는 오브락 자선병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공포와 깊은 적막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고 묘사될 만큼 적대적이고 악명이 높았다.
중세에 이곳을 지나가던 한 순례자가 이 같은 위험을 직접 겪게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달라르. 플랑드르의 백작이었다. 그 역시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서쪽 끝을 향해 걸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오브락 고원을 지나갈 때는 강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돌아올 때는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때 그는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몸을 피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병원과 수도원을 짓겠다고 맹세했다. 이렇게 지어진 수도원과 병원은 수도원 원장 휘하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규율에 따라 살아가는 동(dom, 수도사)이라고 불리는 수도사들에 의해 관리되었고, 이 규율은 공동생활과 침묵, 순결, 복종을 요구했다. 이 수도사들은 또 일주일 중에 4,5일은, 그리고 종교축제 때는 육식을 할 수 없었다. 이 오브락 자선병원은 교황의 직속기관이었고,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동들을 임명할 수 있었다. 옷도 변변하게 못 입고 신발도 제대로 못 신었던 옛날의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게다가 늑대들과 강도들의 위협에 맞서야만 했었을 것이다.
오브락 자선병원은 순례자들과 여행객들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오브락 고원에는 일 년 내내 안개가 자주 끼어서 방향을 분간 못할 위험이 매우 컸고, 특히 겨울에는 눈보라 때문에 길을 찾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게다가 중세 초부터는 도둑떼가 이 지역에 들끓는 바람에 순례자나 여행자들은 만약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명이 모여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수도사들은 순례자가 나타나면 맞아들여 우선 손을 씻으라며 물을 가져왔다. 그런 다음 두 발을 씻겨주고 입고 있는 옷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이와 흙을 털어낸 다음 잠자리와 먹을 걸 제공했다. 수도사들의 이 같은 행위는 유용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징적이기도 했다. 즉 성서에 따르면 가난한 자를 맞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순례자는 별도의 건물에서 보살피고 치료해주었다. 그들에게는 신경도 더 쓰고 양도 더 많은 식사(“알리고”)와 푹신푹신한 침대를 제공해주고 머리맡에서 치료를 해주었다. 이들이 묵는 건물은 조명도 더 밝았다. 이들은 다 나을 때까지 얼마든지 오래 머물 수 있었으며, 만일 동행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이 다 나을 때까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만일 순례자가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면 수도사들이 나서서 묻어주었다.
성당 종탑에는 다섯 개의 종이 매달려 있었고, “마리아” 또는 “길 잃은 자들의 종” 이라고 불렸던 그중 하나의 종은 눈이 오거나 안개가 끼는 날에 길을 잃은 순례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몇 시간 동안 울렸다고 전해진다. 이 종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종이 신을 찬양하고 / 수사들을 위해 노래하고 / 악마들을 쫓아내고 / 길 잃은 자들을 데려오네.>
교회 옆에는 <영국인들의 탑>이라고 불리는 높이 30미터의 건물이 서 있다. 그 당시 프랑스가 영국과 백년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영국인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뒤랑 올리에라는 수도사가 이 탑을 급히 세웠다. 세워질 당시만 해도 이 탑은 성채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지만, 성채는 그 이후에 사병(私兵)들에 의해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탑만 남아 있다.
성당기사단 수도사들과 자선수도회 수도사들은 물론 알비 십자군들도 오브락 자선병원의 막대한 재산을 탐냈다. 이어서 영국인들이 1370년에서 1385년까지 이곳을 점령했고, 종교전쟁 때는 위그노들이 이곳을 차지하자 다시 가톨릭교도들이 빼앗아 약탈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수도원을 지키던 수도사들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결국 1793년에 쫓겨났다.
남아 있는 건물들은 이 광활하고 황량한 오브락 고원의 오아시스와도 같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이 고립되고 위험한 지역에 자리 잡고 아프고 지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용기에 관해 생각했다. 사람이 살기 힘든 이런 환경에 적응하여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 없이 오직 자신의 꿈을 좇아 길을 나선 자들의 순례만큼이나 위대하다. 나는 헌신이라는 미덕을 배운다.
■ <영국인들의 탑>은 순례자들의 숙소다. 그러나 취사시설은 없으므로 식사는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되는 <도므리 식당(Restaurant de la Dômerie)>에 가서 해야 한다.
오브락에는 <제르멘네(Chez Germaine)>라는 오래 된 카페가 있다. 이 카페는 과일이 듬뿍듬뿍 올려지는 파이로 유명하다. 나는 오브락에서 잠을 자든, 아니면 오브락을 그냥 지나치든 항상 이곳에 들러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파이 한 조각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