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출발점, 르퓌는 레이스 짜는 여인들의 도시다

by 이재형
puy 레이스 짜는 대에 방추를 올려놓고 손으로 직접 레이스를 짜는 여성.JPG


나는 이곳에서 레이스 짜는 여성들을 보며 프랑스 작가 파스칼 레네  
Pascal Lainé가 쓴 《레이스 뜨는 여자
La Dentelliere》(1974)의 주인공 폼므(사과)를 떠올렸다. “그녀의 길지 않은 손가락은 뜨개질 연
습을 할 때면 열에 들뜬 듯 움직였다. 그 놀림은 그녀와 거의 따로 노는 듯 보였지만 그녀 안에 존재하는 섬세함과 육중함의 통일성을 깨트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하는 일은 그 어떤 것이든 곧장 이런 조화, 이런 통일을 이루었다. 그때 그녀는 구성과 세부가 그 모델을 마치 몸짓 속에 박아 넣은 것처럼 비치는 그런 풍속화 가운
데 한 폭이 됨직했다. 이를테면, 틀어 올린 머리를 매만질 때 머리핀을 입으로 무는 그 자세! 그녀는 ‘속옷가지를 맡은 하녀’, ‘물 나르는 여인’ 또는 ‘레이스 뜨는 여자’였다.”

르퓌의 레이스 짜는 여성들은 천년은 되었을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이처럼 실을 짜 섬세한 무늬를 빚어내고, 그 무늬는 예술작품이 된다.



puy 베르메르의 레이스 뜨는 여자.jpg


네덜란드 화가 얀 페르메이르  
Jan Vermeer의 〈레이스 뜨는 여자〉.
루브르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은 그림(23.9cmX 20.5cm)에서는 한 여성이 테이블에 앉아 레이스를 짜고 있으며, 옆에는 성경책으로 추정되는 책과 바느질용 방석이 놓여 있다. 다른 관람객들처럼 나도 이 그림을 보며 놀라운 고요와 평온을 느낀다. 나는 이 같은 아름다움과 평화를 사랑한다. “그녀가 짠 세공품의 투명함 자
체 속에서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이 여성의 우아한 자태만 몇 시간씩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몸을 살짝 숙이고 있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어서 고상한 기품이 풍긴다. 외부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채 오직 그녀의 유일한 활동, 레이스 짜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몰입하고 있어서 그녀는 한층 더 아름답다. 그녀의 두 손은 시간과 현실의 밖에 매달려 있는 듯하고, 은은한 빛과 부드러운 곡선(방석 밖으로 삐져나온 실, 가르마, 얼굴 오른편의 곱슬곱슬한 머리털, 옷깃)은 그녀를 내밀하고 충만하며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페르메이르는 레이스 직조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에 충만함과 영원성을 부여하여 여성들의 육체노동을 예찬한다. 그리고 그들의 부드러움과 인내, 덕성을 찬양한다.
레이스를 짜는 여인들의 평온과 인내, 집념이야말로 순례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1930년경 르퓌의 레이스 가게, 퍼블릭 도메인.jpg



레이스 박물관이 있고, 레이스 뜨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가 있으며, 세귀레 거리와 펠르랭 거리, 생조르주 거리 등 구시가지에서는 섬세하게 짠 레이스 세공품을 파는 가게와 레이스 짜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르퓌는 15세기부터 유럽 전역에 순례의 출발 도시로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상인과 보부상이 몰려들었고, 그 덕분에 레이스 산업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의상(깃, 소매, 장갑, 장화 등)과 가구, 마차를 화려하게 장식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정도가 지나쳐 루이 13세가 옷에 레이스 다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을 정도였다.
이때 르퓌 인근 지역에 레이스 뜨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복자   
béate, 福者”라고 불리는 여성들이다.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 시기에 이들은 마을 사람들이 지어준 집에서 먹고 자며 레이스 짜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은 물론 아이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고 글을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쳤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르퓌 지역의 레이스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공화국 정부가 이 복자들이 광적인 신앙을 퍼트린다는 이유로 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1907년경의 복자, 퍼블릭 도메인.jpg

1907년경의 복자


이로써 영영 사라져 버릴 듯했던 르퓌의 레이스는 1802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소개되어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받고, 뒤이어 레이스 학교 두 곳과 레이스 박물관이 세워지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는다. 이때 레이스는 창의적 정신과 세련된 취향이 결합되면서 하나의 예술로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르퓌가 위치한
오트루아르 
Haute-Loire 지방에만 해도 레이스 기술자가 15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초등학교 교육에 관한 법이 제정되어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금지하면서 복자들이 레이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교사들로 대체되면서 레이스를 짤 수 있는 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 후로도 손으로 짜는 르퓌 레이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두 차례의 전쟁으로 그러한 노력은 무산되었다. 그 결과 매우 연로한 여성들만이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서 방추를 다루며 레이스를 짤 뿐 기술을 가르쳐주는 학교도, 필요한 재료를 파는 가게도 없어졌다. 레이스의 존재가 르퓌에서 거의
완전히 잊혀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4년에 르퓌에 설립된 ‘레이스 교육 센터’는 모든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지금까지 수천 명에 이르는 ‘레이스 뜨는 여자’들을 길러냈고, 르퓌의 레이스는 프랑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1860년경의 르퓌 레이스 무늬, 퍼블릭 도메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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