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퓌순례길, 나무에 관한 생각

by 이재형
이제 막 르퓌를 떠난 순례자들. 저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프랑스의 마리아상이다..JPG

이제 막 르퓌를 떠난 순례자들. 저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프랑스의 마리아상이다.


순례 첫날, 르퓌를 출발하여 숙소가 있는 생프리바달리에Saint￾Privat-d’Allier까지 걷다 보면 돌담이 지천이어서 영락없이 제주도에 와 있는 듯하다. 모르타르 없이 올려놓은 돌들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큰 돌 작은 돌, 못난 돌 잘난 돌, 둥근 돌 네모진 돌이 차별 없이 골고루 섞여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담을 쌓아올렸으니, 꼭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 같다.
골고루 섞여 있는 돌의 세계처럼, 순례자의 세계에도 차별과 배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중요하지 않으며, 가난한지 부유한지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순례자의 세계는 완전히 평등한 세계다.
따사로운 돌담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초록색 도마뱀이 나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다.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는 시가 저절로 입속에 맴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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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과 생울타리, 그리고 줄지어 늘어선 물푸레나무, 이 세 가지가 블레이 지방의 농촌 풍경을 이룬다. 물푸레나무는 농촌 생활을 상징하는 나무로 온갖 종류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서 가축들에게 아주 좋은 먹이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초원에 풀이 드물어지면 농민들은 이 나무를 가지치기해서 잎이 달린 가지는 소나 양에게 던져 준다. 가축들은 가지와 껍질, 잎사귀 등 이 나무의 모든 것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어치운다. 어떤 농민들은 가지를 말려서 겨울 내내 가축들에게 사료로 준다. 물푸레나무는 자기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 데 대해 앙심을 품지 않고 그다음 해에 다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낸다. 이 나무는 땔감으로도 쓰고 가구와 연장을 만들기도 한다. 물푸레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나무인 것이다. “한 잎의 여자”처럼…….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 잎의 女子(오규원)


이 블레이 지역은 매우 오래전에 화산이 폭발했던 곳이라서 땅이 기름지고, 그 덕분에 아주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비옥한 토양에서는 AOC(원산지 명칭 통제) 라벨을 받은 르퓌 렌즈콩이 생산되고, 고지대에서는 보리나 호밀 같은 낟알식물과 사료용 목초를 번갈아가며 재배한다. 이곳의 겨울은 혹독할 정도로 춥기 때문에 농가마다 매서운 북풍한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애쓴다.

르퓌순례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물푸레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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