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피에뒤포르Saint jean pied de port를 향해 가기 위해 나바랑스의 성문을 나서면서 성벽을 보면 현판이 하나 붙어 있다. “1828년 카롤린 드 생크리크와 함께 와서 나바르 성을 구경한 프란츠 리스트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를 기억하며.” 리스트는 열일곱 살 때 그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카롤린 드 생크리크와 함께 이곳 성에 올라 나바랑스를 내려다보았다. 카롤린은 그보다 한 살 연상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요즘 사람들 표현대로라면 리스트는 ‘사랑꾼’이었고, 그의 삶은 사랑의 순례였다. 그가 생전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을 느낀 건 열한 살 때였다. 1822년 빈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그보다 일곱 살 위인 헝가리 출신 성악가 카롤리네 웅거 Karoline Unger(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이 비엔나에서 초연되었을 때 베토벤이 귀가 완전히 멀어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자 그의 손을 잡고 청중 쪽으로 돌려세운 바로 그 성악가)에게 어렴풋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아 버지가 죽고 나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리스트는 피아노 레슨을 해야만 했고, 그중 한 명이 상업산업부 장관의 딸인 카롤린이었다. 두 사람은 카롤린 어머니의 승낙하에 플라토닉 러브를 나누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용인했던 카롤린의 어머니가 죽고 나자 딸을 귀족이 아닌 평민과, 더더구나 예술가와 결혼시킬 생각이 없었던 아버지는 피아노 레슨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딸을 귀족과 결혼시켰다. 이에 절망한 리스트는 또다시 깊은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두 사람은 거의 20년이 지난 뒤에 인근 도시 포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다. 그 뒤로 리스트는 마리 다구 Marie d’Agoult, 카롤리네 드 자인 비트겐슈타인 등 여러 여성과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한다. 세 아이(둘째 딸 코지마는 남편과 헤어지고 리스트보다 두 살 많은 바그너와 결혼했으니, 이 사랑의 열정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을까?)를 낳았던 다 구 부인과의 격렬하고 화려한 사랑이 끝나고 만난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반대로 지적이고 차분한 여성이었다. 그는 다구 부인과의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해준 그녀를 만나 〈위안Consolation〉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그가 당시 느낀 행복이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통해 잘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 후에 독일 시인 프라일리그라트Ferdinand Freiligrath의 시 〈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으로 가곡을 작곡했고, 다시 이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다. 이 피아노곡이 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랑의 꿈〉이다.
카롤린
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사랑하고 싶은 한 시간이 오리라 그대가 무덤가에서 슬퍼할 시간이 찾아오리라 그리고 애써라 마음이 불타오르도록 그리고 사랑을 품도록 사랑을 간직하도록 또 다른 마음이 그대의 마음을 향해 사랑으로 따뜻하게 두근거리는 한 그리고 그대에게 자기 가슴을 열어놓는 사람 그 사람를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그리고 그를 항상 기쁘게 하라 그리고 그를 절대 슬프게 하지 마라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부인과의 잔잔하고 평온해 보였던 사랑에도 고통은 존재했던 것일까?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에 누군가 돌 하나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듯 〈사랑의 꿈〉에서는 일순 고통스러운 슬픔이 느껴진다. 밝은 환희와 어두운 슬픔, 어쩌면 이것이 사랑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나는 이런 이유에서 예브게니 키신Evgeny Kissin이 연주한 〈사랑의 꿈〉을 즐겨 듣는다. 그가 연주하는 〈사랑의 꿈〉은 ‘사랑의 슬픔’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린다.) 그런데 이 슬픔은 카롤린 드 생크리크와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서 비롯한 게 아니었을까? 과연 그는 비트겐슈타인 부인과의 결혼이 무산되자 종교의 세계에 귀의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 반지 하나를 남기며 카롤린 드 생크리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바랑스
나는 길을 걸으면서 리스트의 음악 여행기라고 할 수 있는 〈순례의 해 Années de pèlerinage〉를 듣는다. 이 잔잔하고 서정적인 음악은 나바랑스에서부터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경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 음악은 마리 다구 부인과의 사랑의 순례기인 동시에 종교적 순례기이기도 하다. 나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구성하는 수많은 곡 중에서도 특히 제1권의 ‘오베르망의 골짜기’가 좋다. 이 곡에서는 낭만과 격정, 욕망 등 사랑의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체념과 순화 등 종교적이며 금욕적인 감정 도 잔잔하게 흐른다. 나는 특히 라자르 베르만 Lazarn Bermann이 1977년에 녹음한 음반을 즐겨 듣는데, 이 음반은 무라카미 하루키 덕분에 다시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