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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May 05. 2018

<레미제라블>의 현장을 찾아 4

이 성당 앞을 지나 리볼리 거리를 50미터 가량 걷다가 오른쪽으로 나 있는 레자르시브 거리로 접어들면 바로 라 브르리 거리가 나타나는데, 이 거리 16번지에서 <ABC의 벗> 멤버인 쿠페이락이 살았다. 쿠페이락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 거리로 이사를 왔는데, 모순에 가득 찬 사회적 현실에 분노하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이 거리야말로 혁명의 불꽃이 되살아나기에 적당한 곳이었던 것이다. 고르보 여관(<레미제라블>에서 여러 가지 극적 사건이 발생하는 이 여관은 파리 동쪽 오스테를리츠 기차역 앞으로 나 있는 오피탈 대로 50번지에서 52번지까지를 점유하고 있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면 이 동네는 1820년대만 해도 파리와 파리 외곽을 나누는 성벽이 근처를 지나가는 빈민가였다고 한다)에서 테나르디에가 자베르에게 체포되자 주소를 바꾸어야만 했던 마리우스는 쿠르페이락에게 잠시 재워주고 먹여줄 것을 간청한다.  



라마르크 장군의 동상


 1832년 6월 1일, 라마르크 장군이 같은 해 2월부터 파리에 잠복하며 2만 명이나 되는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에 희생되었다. 루이-필리프에게 맞섬으로써 프랑스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그의 장례행렬은 6월 5일 아침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나 장지인 랑드로 향하기 위해 파리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행렬이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 오후 2시쯤 지금의 오스테를리츠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다리 초입에 다다랐다. 바로 그때 그 근처의 앙리 4세 대로에 자리 잡고 있던 용기병 부대 건물에서 병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왔고, 잠시 후 근처 부르동 대로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시위자들은 흥분했고, 또 다른 용기병들이 부대에서 쏟아져 나와 군중들에게 발포하자 시위는 한층 더 격렬해졌다. 그러자 용기병들은 바스티유 광장 근처에 있는 라 스리제 거리와 르 프티-뮈스크 거리로 일단 후퇴했다. 


   

1832년 혁명을 묘사한 판화



 같은 날 밤, 시위자들이 파리의 주요 지역을 점거했다. 군과 공화주의자들은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군은 국민방위군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결국 권력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1832년 6월 혁명은 1830년 혁명 당시 봉기했던 국민방위군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피로 물들게 되었다.    

  6월 5일 저녁, 두 개의 바리케이드가 혁명군에 의해 보부르 동네에 세워졌다. 하나는 생-마르탱 거리와 생-메리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또 하나는 생-마르탱 거리와 생-모뷔에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졌다. 이 두 개의 바리케이드는 생-마르탱 거리 30번지에 자리 잡은 혁명군 사령부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정규군과 국민방위군은 마지막으로 이 사령부를 점령하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리고 1832년 6월 혁명은 이틀 만에 막을 내리면서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는 이 혁명의 주역들을 ‘길 잃은 형제들’이라고 부른 공화주의자들의 기억으로부터도 지워져야 할 오류로 간주되었다. 


          

페르라세즈 묘지에 있는 1832년 혁명 희생자 기념비


  그러나 영원히 잊혀질 뻔 했던 이 민중혁명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1832년 6월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코제트의 보호자인 장발장은 그녀와 함께 롬 아르메 거리 7번지에 살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롬 아르메 거리는 지금의 라 브르리 거리에서 50미터 가량 북쪽으로 가면 나타나는 레 자르시브 거리 40번지와 일치한다. 장발장은 이웃사람들이나 경찰이 수상쩍게 생각하지 않도록 센 강 남쪽의 플뤼메 거리와 우웨스트 거리, 그리고 이 롬 아르메 거리 세 곳에 동시에 집을 빌렸다.   

  1832년 당시만 해도 <레알> 지하철역의 랑뷔토 거리 쪽 출구와 몽데투르 거리 쪽 출구 사이에는 <레미제라블> 덕분에 유명해진 <ABC의 벗> 멤버들의 모임 장소 코랭트 술집이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이 술집 주변에 라 샹브르리 거리의 바리케이드 두 개를 상상해 세운다. 이 작품에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던 라 샹브르리 거리는 지금의 그랑드-트뤼앙드리 거리와 레 프레쇠르 거리의 중간, 랑뷔토 거리의 북쪽 편으로 설정되었다. 


     

<ABC의 벗들> 모임



  “생-드니 거리에서 라 샹브르리 거리로 들어서는 행인은 마치 좁은 깔때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이 거리가 조금씩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척 짧은 이 거리 끝까지 가보면 그는 죽 늘어선 높은 집들로 차단되어 있는 시장 쪽 통로를 발견하는데, 만일 좌우에 긴 구덩이 같은 게 있어서 그리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자기가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몽데투르 거리로서, 한쪽은 레 프레쇠르 거리로 이어지고 또 한쪽은 르 시느 거리와 라 프티트-트뤼앙드리 거리로 이어진다.”

 이 일종의 막다른 골목 안쪽, 오른쪽 구덩이와 만나는 모퉁이에 다른 집들보다 낮고 꼭 무슨 곶처럼 길거리로 삐죽 나와 있는 집이 한 채 있었다. 2층밖에 안 되는 이 집에 300년 전부터 유명한 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이제 두 개의 바리케이드가 동시에 세워졌는데, 둘 다 코랭트 술집에 기대여져 있으며 직각을 이루고 있었다. 큰 바리케이드는 라 샹브르리 거리를 봉쇄했고, 다른 바리케이드는 르 시뉴 거리로 이어지는 몽데투르 거리를 봉쇄했다.”[<레미제라블>, 제 4권 12부]


  



  1789년 프랑스혁명의 현장인 센 강 북쪽의 바스티유 광장 한가운데에는 1812년서부터 1840년대까지 나무와 석고로 만든 높이 24미터의 코끼리상이 버티고 서 있었다. 원래 나폴레옹은 이 코끼리상을 대리석으로 만들어 프랑스 국민의 힘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삼으려 했으나 돈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빅토르 위고는 이 코끼리상 안에서 살고 있는 한 소년을 우연히 보고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가브로슈의 캐릭터를 상상해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이 그림은 1830년 혁명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 총을 든 소년이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가부로슈의 모델이 되었다. 




  1832년 6월 5일, 마리우스는 이 가브로슈가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쪽지를 주고 롬 아르메 거리로 가서 코제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코제트가 아닌 장발장에게 쪽지를 전해주고 난 가브로슈는 르 숌므 거리(현재의 랑뷔토 거리와 오드리에트 거리 사이에 위치해 있는 레 자르시브 거리 일부)와 레 비에이으-오드리에트 거리(지금의 레조드리에트 거리), 레 장팡 루즈 거리(지금의 파스투렐 거리와 포르트프앵 거리 사이에 위치해 있는 레자르시브 거리의 일부)를 지나 샹브르리 거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가브로슈는 바로 이 라 샹브르리 거리에 세워진 바리케이드 앞에서 총탄을 줍다가 진압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바리케이드가 세워진 거리에 사는 주민들이 혁명군을 외면하면서 1832년 6월 혁명은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져갔다.  

 장발장이 바리케이드를 사수하다 총에 맞은 마리우스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하수도는 에펠탑 근처의 알마-마르소 옆에 박물관이 있어 그 긴박한 상황을 몸으로 직접 느껴볼 수가 있다.   

           


   

1832년 6월 혁명이 이렇게 실패로 끝나고 나서 자베르는 노트르담 다리의 센 강 우안 모퉁이에서 센 강으로 몸을 날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거의 평생 동안 장발장을 쫓다가 결국 6월 5일 혁명을 일으킨 민중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라 샹브르리 거리까지 그를 잡으러 갔었다. 하지만 혁명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될 뻔 했으나 장발장은 그를 한쪽으로 데려가 놓아주고, 자베르는 회한에 휩싸여 장발장 추격을 포기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다. 


   

자베르


             

장발장과 자베르

 

  그러나 1832년 6월 혁명의 불씨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높은 물가 상승률과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봉급 인상률. 그로 인해 견고하게 고착된 빈곤. 이익을 독식하는 대기업들. 실업에 대한 일상적 공포. 무거운 세금. 비인간적인 법률. 효율적이지 않은 정부.... 바로 이것이 2013년 현재 프랑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한국이라고 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니, 프랑스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레미제라블>이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건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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