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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May 23. 2018

프랑스 혁명의 현장, 바스티유 광장

   바스티유 성은 원래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세기에 파리 동부를 지키는 전진 초소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저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이 되었죠. 왕이 누구를 가두라는 편지에 서명만 하면 그 사람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일단 갇히면 석방시킨다는 왕의 편지가 있어야만 거기서 풀려날 수 있었죠. 이 편지에는 죄목도 안 쓰이고 투옥 기간도 안 쓰여 있어서 왕이 누구를 바스티유 감옥에 가두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크기는 68미터에 37미터였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바스티유 감옥



    여기에 갇혀 있던 사람들 중 유명인사로는 우선 루이 14세의 재정담당관인 푸케가 있고, 루이 14세의 애인이었다가 총애를 잃은 몽테스탕 부인을 위해 흑마술을 부리면서 2,5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태워 죽였다고 진술한 라브와쟁이라는 여자, 35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고 탈출 신기록도 갖고 있는 라튀드, 여왕의 목걸이 사건에 연루된 드 로안 추기경과 라 모트 부인, 카글리오스트로, 드 사드 후작, 그리고 원래는 이태리 귀족인데 루이 14세를 배신하자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끌고 와서 가두어놓은 철가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갇힌 적은 없어서 평균 40명 정도였고, 루이 16세 때는 16명에 불과했지요. 더더구나 수감 조건도 아주 좋아서 어떤 죄수들은 하인도 둘 수 있었고, 친구도 불러들일 수 있었으며... 로한 주교는 친구를 20명 불러 파티를 한 적도 있습니다... 교도소장의 정원을 산책할 수도 있었으며, 음식이 맛없다며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는 감옥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이 감옥 때문에 도시가 동쪽으로 발전해나갈 수가 없어서 넥케르 장관은 그걸 철거하려고 계획했지요. 그런데 1789년 7월 13일 군대가 개입한다는 소문과 팔레-르와얄에서의 카미유 데물렝의 열정적인 연설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군중들은 앵발리드와 아르스날에 이어 바스티유로 무기를 찾으러 말려들었지요. 그들은 여기서 일곱 명의 죄수를 찾아냈습니다. 네 명은 위조 지폐범이었고, 한 명은 근친상간을 저지른 귀족이었으며, 한 명은 루이 15세를 살해하려 한 혐의로 30여 년 전부터 갇혀 있었고, 마지막 한 명은 미치광이였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불타는 바스티유 감옥



   앵발리드에서 32,000정의 총을 탈취한 군중들은 바스티유에서 화약과 탄약을 탈취하려고 감옥을 공격, 100명이 사망하고 73명이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863명이 바스티유 승리자 증명서를 받았지요. 

    1789년 7월 15일부터 팔로이라는 기업가가 700명을 고용해서 공식허가 없이 감옥을 허물기 시작해서 대부분은 파리의 건물을 짓는 건축자재로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지요. 그리고 바스티유 감옥의 모형을 새긴 돌 83개를 각 지방에 보내 전제주의의 공포를 영원히 기억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오스테를리츠 승리 후에 이곳에 개선문을 세우려 했으나 포기하고 24미터짜리 코끼리 모양의 분수를 대리석으로 세우기로 합니다. 그런데 대리석은 너무 비싸서 오페라 극장 쪽에 석고로 세우죠.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가브로슈가 살던 곳으로, 빅토르 유고는 여기서 사는 소년을 보고 가브로슈라는 캐릭터를 상상해내지요. 그러나 훼손되어 쥐들이 들끓자 1846년에 파괴합니다. 


   



   광장 한가운데의 저 탑은 7월탑으로, 1830년 7월 혁명으로 왕이 된 루이-필리프가 그때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건설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대리석 탑을 계획하여 1831년에 기공했으나 밑에 운하가 흘러 포기했죠. 

   꼭대기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5미터인데, 한손에는 문명의 불꽃을, 다른 손에는 전제주의의 끊어진 사슬을 들고 있어요. 1834년에 완공되었는데, 길이가 50미터에 달합니다. 

   아래 부분에는 1830년 7월 혁명의 3일을 조각하고 504명의 희생자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지하에는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요. 


    


  저 현대식 건물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인데,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이 1969년에 문을 닫은 기차역 자리에 가르니에 오페라극장에 맞먹는 오페라극장을 짓자고 제안하여 이 파리 동쪽 서민동네에 건설되었습니다. 모두 756개의 설계안이 응모했는데, 그중에서 캐나다 사람의 것이 채택되었죠.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완공되었으며, 정면 높이가 7월탑의 높이와 같습니다. 정명훈 씨가 한때 이 극장의 교향악단 지휘자로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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